"원가 밑돌아도 경쟁업체 신뢰 안해 생산 못줄인다"
"공급과잉에 상당수 업체들 올 여름 넘기지 못할 것"
미국 천연가스업체들이 ‘고통스러운 봄’을 맞고 있다. 원유시장보다 심각한 공급 과잉과 수요 부진으로 상당수 업체가 올여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업체들이 생산을 줄이고 싶어도 서로 눈치를 보느라 줄일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고 분석했다.
'죄수의 딜레마' 빠진 미국 천연가스…가격하락에도 생산은 사상 최대

◆가격은 17년래 최저…생산량은 최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달 미국의 하루평균 천연가스 생산량이 73억입방피트로 전달보다 2% 증가하며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고 에너지 관련 정보업체 플래츠벤텍의 자료를 인용, 27일 보도했다.

WSJ는 공급 과잉으로 이미 많은 기업이 이익을 낼 수 없는 수준으로 가스 가격이 하락했지만 생산량이 늘면서 추가 하락 압력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 25일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천연가스 4월물 선물가격은 전날보다 5.3% 떨어진 MMBtu(100만파운드의 물을 화씨 1도 올리는 데 필요한 열량)당 1.806달러로 거래를 마쳤다. 1999년 이후 17년 만의 최저치다. 지난해 5월 이후 11개월 만에 40% 떨어졌으며, 올 들어서도 23% 급락했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지난 겨울 날씨가 이례적으로 따뜻해 가스 수요가 줄었지만 업체가 공격적으로 생산을 지속하면서 공급 과잉이 심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달 중순 이후 주요 산유국이 생산량 동결을 위한 협의에 나서면서 국제 유가가 반등, 최근 배럴당 40달러 내외에서 거래되는 것과 대조적이라는 설명이다.

천연가스 수요 부진과 공급 확대의 악순환이 계속되면서 재고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지난 18일 기준 미국의 천연가스 비축량은 2조5000억입방피트로, 최근 5년간 이맘때 평균 재고량보다 51% 많다. 에너지 전문가들은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는 10월 전까지 재고가 4조입방피트까지 늘어날 수 있다며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원가 밑돌아도 생산 줄일 수 없어

WSJ는 천연가스 업계가 직면한 상황을 ‘죄수의 딜레마’에 비유했다. 두 공범자가 모두 범죄 사실을 숨기면 가벼운 형량을 받지만, 한 사람이 먼저 죄를 자백하면 나머지가 불리하게 돼 죄를 실토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판매 가격이 원가를 밑도는 상황에서도 생산량을 줄일 수 없는 처지라는 분석이다.

ING그룹에서 에너지 투자를 담당하는 리처드 에니스는 “업체들이 생산할수록 손해를 보지만 생산을 중단하면 더 큰 손해를 입는다”며 “업체가 스스로 생산량을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한 업체가 생산량을 줄이더라도 다른 업체의 시장점유율만 높여주고 가격은 올라가지 않아 결국 더 큰 손해를 피하기 위해 생산량을 늘릴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미국에서 가동 중인 가스시추설비(리그)는 지난주 기준 92기로, 1년 전보다 절반 이하로 줄었지만 업체들이 설비효율을 높이면서 생산량은 별로 줄지 않았다.

WSJ는 콜로라도와 아칸소, 텍사스 지역의 천연가스 생산량이 줄었으나 오하이오와 펜실베이니아에서 늘어난 생산량이 이를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라고 전했다.

석탄 수요를 천연가스로 돌리기 위해 천연가스 가격을 더 낮출 필요가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결국 원가경쟁력이 약한 가스업체가 나가떨어지면서 가격이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WSJ는 냉방용 전기 수요가 늘어나기 전까지 천연가스 가격은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며 추가 하락이 불가피하다고 관측했다.

플래츠벤텍의 한 분석가는 “올여름이 시작되기 전 많은 업체가 부도를 맞는 대학살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 죄수의 딜레마

자신만의 이익을 위한 선택이 자신과 상대 모두에게 불리한 결과를 낳는 상황을 뜻한다. 두 공범자가 협력해 범죄사실을 숨기면 증거불충분으로 형량이 낮아지지만 범죄사실을 먼저 자백하면 다른 한쪽보다 가벼운 처벌을 받게 해준다는 수사관의 유혹에 빠져 어느 한쪽이 범죄사실을 털어놓으면 결국 공범자 모두 더 큰 처벌을 받는다는 이론이다.

뉴욕=이심기 특파원 sglee@hankyung.com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