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10월2일. 영국해협의 짙은 안개로 영국과 유럽을 오가는 선박, 항공기 운항이 일시적으로 중단됐다. 영국이 자랑하는 231년 역사의 일간지 더타임스는 당시 “안개 때문에 유럽대륙이 고립됐다”는 제목을 달았다. 유럽인들이 영국으로 들어올 길이 막혔다는 뜻에서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 후예들의 콧대는 그만큼 높았다.

더 이상은 아니다. 영국이 넉 달 앞으로 다가온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를 놓고 홍역을 치르고 있다. 영국이 유럽연합(EU)을 벗어나 홀로서기를 강행하면 경제 위축이 불가피하다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브렉시트 가능성에 영국 파운드화 가치는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수준으로 급락했다. ‘내전’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찬반을 놓고 국론이 분열되고 있다. 영국인들은 왜 EU에서 떠나려 할까.
[글로벌 컨트리 리포트] 브렉시트 고민 커진 영국…"EU 남아봐야 책임 늘고 경제이득 없다"
영국인 절반 “EU 탈퇴” 주장

브렉시트는 EU의 존립 근거를 뒤흔들 만한 파괴력을 갖고 있다. 브렉시트가 현실화되면 두 차례나 세계대전을 치른 유럽이 전쟁의 공포와 폐허를 딛고 구현한 통합의 연합(EU)은 또다시 분열의 시대로 접어들 수 있다. 그럼에도 영국이 브렉시트를 들고 나온 건 이민자, 난민 등의 문제에 맞닥뜨리면서 ‘자국 이기주의’의 요구가 그만큼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지난 19일 EU 정상들과 30시간 마라톤 회의 끝에 EU 개혁안에 합의했다. 개혁안은 영국에만 특별한 지위를 보장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제 영국은 이민자에 대한 복지혜택을 축소할 수 있고, EU 의회가 제정한 법률을 거부할 권한을 가진다.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19개국)의 결정이 영국 금융산업 등에 피해를 줄 때 긴급제한 조치를 요구할 수도 있다. EU가 정치·경제적으로 통합을 강화할 때 영국은 동참하지 않아도 된다.

“브렉시트가 발생하면 EU도 타격을 입는다”는 영국 정부의 ‘협박’에 EU는 요구사항을 대부분 들어줬다. 영국은 캐머런 총리의 합의안을 바탕으로 6월23일 브렉시트 결정을 위한 국민투표를 치른다. 1973년 1월1일 EU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EEC)에 가입한 지 43년 만에 탈퇴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영국의 탈퇴 가능성을 점치기는 어렵다. 텔레그래프는 6개 여론조사를 조합한 결과(22일 기준)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의견과 반대하는 의견이 각각 45%와 55%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내각 안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30명의 장관급 인사 가운데 마이클 고프 법무장관과 이언 던컨 스미스 고용연금부장관 등 6명이 캐머런 총리에게 반기를 들었다.

“EU 규제로 피해”…경제주권 노려

브렉시트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EU 탈퇴의 근거로 경제적 이유를 가장 먼저 꼽는다. EU 잔류론자는 EU 회원국 간 무역장벽 해소로 영국의 대(對)유럽대륙 수출이 영국 전체 수출의 절반을 차지하고, 유럽의 대영국 투자가 해마다 240억파운드(약 41조5000억원)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EU 탈퇴론자의 생각은 다르다. ‘탈퇴에 투표를(vote for leave)’ 운동 주도자들은 “EU 기관의 규제가 영국 경제에 끼치는 비용이 매년 333억파운드에 달한다”고 반박한다. 텔레그래프는 “EU 규제는 프랑스 소규모 치즈 생산업자의 생존을 보호하는 데까지 미친다”며 “이런 규제는 영국 경제에 방해가 된다”고 지적했다.

최근 EU가 전기 주전자처럼 전기사용량이 많은 가전제품의 사용을 규제하려다 논의를 당분간 연기하기로 한 것도 브렉시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7일(현지시간) “영국인이 차를 마실 때 쓰는 전기 주전자를 규제한다면 EU에 대한 반감이 더 커질 수 있다”고 보도했다.

EU 분담금도 불만이다. 영국은 지난해 약 180억파운드를 EU에 냈다. 영국이 EU로부터 받는 혜택을 감안해도 90억파운드의 손해를 봤다. 게다가 EU 통합이 가속화되면 EU 예산은 더 늘어나고 결국 영국 부담도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게 탈퇴론자들의 예상이다.

이민자에게 뺏긴 일자리로 위기감 증폭

이민자 문제도 크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위축됐던 영국의 경제가 살아나면서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 동유럽에서 이민자가 급속히 몰려들었다. 지난해 늘어난 50만개 일자리 가운데 이민자가 차지한 비율은 40%를 넘어섰다. 고강도 긴축으로 경제를 살려놨더니 이민자들만 이익을 봤다는 불만이 나오는 까닭이다. EU 이사회에서 영국의 투표권 점유율도 1973년 17%에서 현재 8%까지 떨어졌다.

유럽대륙에 대한 영국인의 이질감도 작용하고 있다. 존 레드우드 보수당 의원은 “브렉시트는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국가를 원하는가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탈퇴에 투표를’ 운동의 홈페이지에는 브렉시트의 첫 번째 장점으로 “EU에서 벗어나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법을 제정하고, 무역거래를 협상할 수 있다”고 적시했다.

탈퇴 찬성 진영은 캐머런 총리가 얻어낸 EU 개혁안도 평가절하한다. 보수적 논조의 더타임스는 사설에서 “유럽사람들에게서 가난한 사람이 먹는 귀리 죽을 조금 얻어왔다”고 혹평했다.

탈퇴론자들은 브렉시트 발생 시 영국의 내년 경제성장률이 1.5%포인트 하락할 것이라는 등의 전망을 최악의 전제에서 출발한 기우라고 일축한다. 유럽 통합에 참여한 이후 영국 경제가 살아난 것은 경제권 통합이라기보다는 마거릿 대처 정부가 추진한 경제활성화 정책이 주효했다는 것이다.

EU 탈퇴론자를 바라보는 외부 시선은 대체로 싸늘하다. 미국외교협회 회원인 기아니 리오타는 “브렉시트가 발생하면 영국이 유럽대륙으로부터 고립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종서 기자 cosm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