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대 억만장자중 자수성가형 미국 71%, 중국 97%

현재 한국의 재벌들은 기업을 상속받아 키웠지만 미국과 중국, 일본 등 다른 나라들의 부호들 대부분은 스스로 창업을 통해 부를 쌓은 것으로 나타났다.

4일 블룸버그의 억만장자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30일 기준 세계 부호 상위 400명을 부의 원천에 따라 분류했을 때 65%인 259명은 자수성가(self-made), 나머지 141명(35%)은 상속(inherited)으로 집계됐다.

400위 안에 든 한국 부호 5명 모두 상속자였다.

이들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 이건희 회장의 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 재벌 2∼3세다.

◇ 세계 10대 억만장자는 모두 창업가…빌 게이츠·제프 베조스·마크 저커버그

세계 최고의 부자인 빌 게이츠(마이크로소프트)를 비롯해 아만시오 오르테가(인디텍스), 워런 버핏(버크셔 헤서웨이), 제프 베조스(아마존), 카를로스 슬림(텔멕스), 마크 저커버그(페이스북), 래리 페이지(구글), 래리 엘리슨(오라클) 등 상위 10명은 모두 자수성가했다.

이들 가운데 오르테가(스페인)와 슬림(멕시코)을 뺀 8명은 미국 출신이다.

억만장자가 가장 많은 미국의 경우, 세계 랭킹 400위 안에 포함된 125명 가운데 자수성가한 사람이 89명으로 71%를 차지해 세계 평균보다 다소 높았다.

김상조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는 "미국은 선진국들 가운데 창업을 통해 기업이 성장하는 생태계가 가장 활성화한 나라"라고 설명했다.

아시아 부호 80명 중에서는 63명(70%)이 자수성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중국 부자의 경우, 29명 가운데 1명만 빼놓고 28명(97%)이 창업가였다.

중국 최고 부자인 왕젠린 완다그룹 회장(세계 13위)과 2위인 마윈(잭 마) 알리바바 회장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밖에 모바일 메신저 위챗으로 유명한 텐센트(텅쉰)의 마화텅과 중국 최대 검색사이트 바이두의 리옌훙(로빈 리) 등이 상위권에 있다.

일본은 세계 400위 안에 든 5명 모두가 창업자였다.

의류 브랜드 유니클로를 세운 일본 최고 부호 야다이 다나시를 비롯해 소프트뱅크의 손정의(손 마사요시), 편의점 체인 세븐일레븐의 이토 마사토시 등이다.

재벌 및 CEO 경영평가 사이트인 CEO 스코어의 박주근 대표는 "중국은 여전히 국영 기업이 많지만 1990년대 초부터 개방 정책에 힘입어 부호가 많이 생겼다"면서 "일본은 상위 50명까지 꼽아보면 창업가가 80% 정도 되는데, 10년간 자료를 보면 신규로 들어오는 부호가 꾸준하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18명 모두, 인도는 14명 중 9명(64%)이 자수성가 부호였다.

다만, 유럽은 자수성가 부호가 54명으로 상속 부호(55명)보다 1명이 적었다.

◇ "이해진·김범수 이후 신진 부호 없다…성장 사다리 막혀"

한국은 부호의 범위를 늘려도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다른 나라와 비교해 현저하게 적다.

CEO 스코어의 지난해 12월 1일 기준 상장사 주식부호 자료를 보면 상위 10명 가운데 창업자는 임성기 한미약품 회장이 유일하다.

나머지는 이재현 CJ그룹 회장과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진 삼성물산 사장 등 재벌 3세들이다.

창업 부자는 30위 안에는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 이해진 네이버 의장, 조창걸 한샘 명예회장 등 6명(20%)이, 100위 안에는 25명(25%)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CEO 스코어의 박주근 대표는 "이해진과 김범수 외에 신진 부호가 나오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창업자는 드물고 할아버지나 아버지로부터 회사를 물려받은 2∼3세 상속자들이 대부분인 한국은 기업의 역동성이 떨어지며 성장 사다리가 막혔다는 지적이 나온다.

◇ 자본시장 미발달…재벌 중심 구조·지나친 규제 지적도

창업 부호가 많이 나오지 못하는 핵심 배경으로 전문가들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것은 틀에 박힌 자본시장이 창업에 제대로 된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상조 교수는 "미국에서 10년, 20년만에 세계 최고의 기업이 생길 수 있는 것도 자본시장이 잘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월스트리트의 금융자본과 실리콘밸리의 벤처캐피털이 전통산업이든 첨단산업이든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는 기업을 찾아서 지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국내의 자본시장이 역동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주문했다.

그는 "우리가 한수 아래라고 생각했던 일본의 금융산업도 우리보다 앞서가고 있다"고 말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임상혁 상무도 "벤처 자금을 지원해주는 쪽에서는 돈이 남아돈다고 하는데, 정작 벤처기업들은 자금을 조달하기 어렵다"면서 "자금을 연결해주는 시스템이 없기 때문이다.

돈을 빌려줄 때 기술을 평가할 능력이 없으니 아직도 담보를 가져오라고 하는 식"이라고 말했다.

박주근 대표도 "신진 산업이 융성하려면 자본 흐름이 자유로워야 하는데, 자본이 대기업집단에만 몰려 있고 새로운 산업으로 들어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재벌 중심의 경제 구조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박 대표는 "재벌이 산업을 지배하고 골목 시장까지 잠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도 "재벌이 경제력을 오남용해 시장을 독과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할아버지, 아버지와 달리 역동적이지 못하고 기업가 정신을 잃어버린 재벌 3세가 부를 지키는 쪽의 의사 결정만 하다 보니 산업이 기존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서 "재벌 3세가 새로운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도 파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전경련의 임 상무는 재벌에 대한 비판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각종 규제를 비롯한 제도적 한계가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직업 수가 우리는 1만개, 미국은 3만개라고 한다.

그만큼 우리는 규제 때문에 할 수 있는 새로운 산업이 제한된 것"이라면서 "기업이 커질수록 수많은 규제가 생기기 때문에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크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창의성을 살리지 못하는 교육도 창업가의 출현을 가로막는다면서 "빌 게이츠가 우리나라에서 태어났으면 크게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안정적 직업 선호…"금수저 아니면 성공 어렵다고 창업 포기"

'코리안드림'은 사라지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이 지난달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대학생 가운데 창업을 희망한 사람은 6%에 불과했지만 중국은 41%나 됐다.

보고서는 한국이 안정적인 직장을 선호하는 분위기인데다 창업 생태계가 구축되지 않아 창업 활기가 저조하다고 분석했다.

전경련의 임 상무는 "우리나라 부모들은 자식이 공무원이나 의사가 되기를 바라지 창업을 권하지는 않는다"면서 "안정 지향형으로 가는 사회 풍토부터 문제"라고 말했다.

김상조 교수는 "금수저 물고 태어난 세습 부자가 아니면 위로 올라갈 길이 막혀 버렸다"면서 "똑똑한 젊은이들은 의사나 변호사만 되려고 한다.

비즈니스로 성공할 가능성이 너무 낮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도전을 포기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부모로부터 상속한 부에서 얻는 수익의 중요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연구 결과도 최근 나왔다.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가 지난해 11월 내놓은 논문 '한국에서의 부와 상속'을 보면 상속·증여가 전체 자산 형성에 기여한 비중은 1980년대 연평균 27.0%에서 2000년대에는 42.0%로 크게 늘었으며 앞으로도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서울연합뉴스) 김윤구 기자 kimy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