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스 루크, 전기스쿠터로 대만서 '돌풍'…파나소닉도 탐낸 괴짜 CEO
2010년 말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 도심에 있는 한 만두가게. 음식을 준비하는 요리사들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만든 주방 창가에 한 사내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서 있었다. 요리사들은 만두에 정교하게 18개씩의 주름을 만들었다. 이를 지켜보던 사내는 무심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사내가 지난 4월 포브스에 털어놓은 후일담은 이렇다.

“그 복잡한 주름을 한결같이 18개씩 만드는 작업을 단조롭게 반복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나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혁신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만약 19번의 주름을 접는 것을 원했다면 회사는 나를 내쫓았을 것이다.”

만두가게에서의 ‘깨달음’ 이후 회사를 때려치우고 사업을 시작한 대만의 전기 스쿠터 회사 고고로(Gogoro) 창업자인 호러스 루크(44)의 얘기다.

‘전기 스쿠터업계의 테슬라S’라고 불리는 고고로는 대만 제조업계의 차세대 아이콘으로 주목받고 있는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이다. 올해 대만에서 출시한 스마트 스쿠터는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며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가고 있다.

숫기 없던 컴퓨터 괴짜

루크는 원래 홍콩 태생이다. 그는 13세에 부모님을 따라 미국 시애틀로 이민을 갔다. 시애틀 인근의 작은 섬 머서 아일랜드에서 자란 그는 숫기가 없고 체구도 크지 않은, 그저 그런 아시아 소년이었다. 루크가 디자인에 눈뜨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다. 그래픽과 디자인을 가르쳤던 여선생 로리 홀은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은사였다. 내성적인 루크에 비해 외향적인 홀은 “언제나 질문을 해야 한다”는 걸 루크에게 일러줬다. 루크는 9월2일자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로리 홀과 나는 단박에 의기투합할 수 있었으며, 항상 질문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 그의 가르침은 내게 많은 영감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했다.

루크는 대학 진학을 앞두고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홀에게 배운 디자인 감각을 살려 장신구를 만들어 팔았다. 시애틀의 워싱턴대에 진학한 그는 적성을 살려 산업디자인을 전공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나이키, 마이크로소프트, Xbox, 구글 모바일팀 등을 전전했다. 브랜드 디자이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등을 비롯해 윈도 모바일 개발 등의 일을 주로 담당했다. 점차 모바일산업에 흥미를 느꼈던 그는 소프트웨어 컴퓨터에 몰두하는 괴짜로 불리기도 했다.

루크가 대만으로 온 건 2006년 대만의 휴대폰 제조업체 HTC에 입사하면서다. 이곳에서 최고혁신책임자(CIO)로 활약했던 그는 주로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제품을 생산하던 HTC가 자체적인 글로벌 브랜드를 내놓는 작업을 담당했다. 20여개의 제품이 그의 손을 거쳐 개발됐다. 하지만 대개의 직장이 그렇듯 혁신보다는 전형적인 능력을 원하는 직장생활에 점차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루크가 우연히 만두가게를 찾았던 것도 이 무렵이었다.

기술혁신에 목말랐던 엔지니어

루크는 회사 동료였던 매트 테일러와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루크와 테일러가 당시 주로 논의했던 건 기술혁신에 관한 것이었다. 사회적으로 충격을 줄 수 있는 기술을 기반으로 한 사업이 그들의 목표였다. 루크는 지난 7일 뉴욕타임스(NYT)에 “스마트폰으로 사람들이 10년 만에 얼마나 바뀌었는지를 보자. 만약 우리가 같은 노력을 에너지에 쏟았더라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바뀔 수 있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들이 눈을 돌린 분야는 대만의 교통산업이었다. 대만의 주된 교통수단은 스쿠터와 모터사이클이다. 전체 인구 2300만명 중 1400만명이 스쿠터를 타는 대만은 세계에서 이륜차가 가장 밀집된 국가로 꼽힌다. 스쿠터가 뿜어내는 대기오염이 심각한 곳이기도 하다. NYT에 따르면 PM2.5(지름이 2.5㎛ 이하)인 초미세먼지가 늘 공기 중에 떠다니고 있어 만성 폐쇄성 폐질환 환자가 늘고 있는 곳이 대만이다. 2행정 엔진 시스템인 스쿠터는 자동차에 비해 100배에서 1000배 더 많은 배기가스를 내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루크와 테일러가 보기에 전기 스쿠터는 기술과 환경보호, 에너지 절감 등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최적의 상품이었고 대만은 이런 사업 구상이 성공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스마트폰과 컴퓨터의 발전은 이미 정체상태였고, 지난 세기 거의 혁신이 없었던 에너지분야는 그들의 기술적 역량으로 뭔가를 창출할 수 있는 블루오션이었다.

미래 세대의 혁신을 꿈꾸는 이상가

2011년 회사를 그만두고 고고로를 설립한 이들은 재력가의 후원을 받아 타이베이 교외에 공장을 마련해 전기 스쿠터 제작에 착수했다. 회사의 비전이 알려질까 걱정이 된 루크는 모든 건물의 창문을 종이로 가리기까지 했다. 작업은 쉽지 않았다. 기존의 스쿠터 부품은 전기 스쿠터를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루크는 “모든 것을 백지에서부터 시작해야 했다”고 말했다.

4년여의 노력 끝에 올해 여름 출시한 고고로 스마트 스쿠터는 말 그대로 대박이 났다. 지난달 말 기준 타이베이 전체 스쿠터 중 5%가 고고로 스쿠터로 대체됐다. 고고로 한 대의 가격은 2200~2375달러 선으로 기존 스쿠터에 비해 두 배가량 비싸지만, 소비자들이 빠른 속도로 전기 스쿠터로 갈아타고 있다. 대기오염에 몸살을 앓고 있는 대만 정부도 전기 스쿠터를 구입하는 소비자들에게 대당 800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고고로 스쿠터는 30개의 센서가 달려 있어 배터리를 교환할 수 있는 장소를 안내한다. 파나소닉이 만든 리튬이온전지를 사용하는 고고로는 현재 90개의 배터리 교환 네트워크를 갖췄다. 교환소는 좁은 장소에 인터넷만 연결되면 만들 수 있도록 해 비용을 최소화했다. 일부 교환소는 세븐일레븐 편의점에 설치돼 있다. 배터리 교환에 필요한 시간은 30초에 불과하다. 한번 교체 후 시속 60마일로 달릴 수 있다. 고고로의 성장성을 눈여겨본 파나소닉과 대만의 부호 새뮤얼 인 루엔텍스그룹 회장 등도 투자자로 가세했다. 고고로는 내년 초 유럽시장 공략을 위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진출할 계획이다.

루크는 사업가이기 이전에 이상가적인 자질도 있다. 내심 스쿠터 회사가 아니라 ‘에너지 회사’로 불리기를 원하는 것도 그의 이런 면모에서 기인한 것이다. 루크는 최근 WSJ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돈에 집중하지 않는다. 충격에 집중한다. 진정으로 세계를 변화시킬 기술을 창출할 수 있다면, 그것이 전부다. 우리는 전형적인 기업의 목표에 집중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가 미래세대에 가할 수 있는 충격 때문에 고고로에 흥분한다.”

이정선 기자 sun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