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키스 스타디움 햄버거 팔던 소년, 동물적 감각으로 시장흐름 간파…10년째 '골드만 제국' 진두지휘
미국 뉴욕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성공을 꿈꿨던 소년은 결국 2006년 세계 최고 투자은행(IB)인 골드만삭스의 최고경영자(CEO)가 됐다. 올해로 10년째 골드만삭스를 이끌고 있는 로이드 블랭크페인 CEO다. 그는 최근 블룸버그가 선정한 ‘시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50인’ 중 8위로 꼽혔다.

부와 성공에 집착하는 태도로 ‘월가 탐욕의 대명사’로 비난받기도 하지만 누구보다 뛰어난 선견지명과 지략으로 골드만삭스가 2008년 금융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게 도왔다. 최근엔 9000여명에 이르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고용해 남들보다 발 빠르게 핀테크(금융+기술) 등 금융업계의 기술 변화에 대응하는 중이다.

가진 건 머리밖에 없던 가난한 학생

그는 1954년 뉴욕 브롱크스의 가난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밤에 우편물을 분류하는 우체국 직원이었고, 어머니는 회사의 접수 담당자였다. 가진 것이라곤 뛰어난 머리밖에 없었다. 지역 명문인 토머스제퍼슨고등학교에 들어갔지만 돈을 벌기 위해 틈틈이 뉴욕 양키스타디움에 가서 핫도그를 팔거나 수영장에서 인명구조요원으로 일해야 했다.

머리로는 고등학교 때 벌써 두각을 나타냈다. 1971년 졸업생 대표로 연설했고 하버드대 사학과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블랭크페인 CEO와 단짝 친구로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리처드 캘브는 미국 경제잡지 포천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매력적이며 위트가 넘치고 매우 똑똑했다”며 “선생님도 모두 그를 좋아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공부를 좋아했거나 미래에 대한 뚜렷한 꿈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나는 천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며 “대신 성공하고 싶었기 때문에 열심히 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버드에 가서 그는 밤새 스타트랙을 보는 등 할 일을 미루는 학생이었다. 시험 기간이 닥쳐야 벼락치기로 공부했다. 졸업 후 하버드 로스쿨에 진학했지만 어느날 수업 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맙소사, 너는 마치 필라델피아 변호사 같구나”라는 말을 들은 데서 막연히 변호사를 꿈꾼 것뿐이었다. 그가 월스트리트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3년의 로스쿨을 거치고 4년 동안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난 다음이었다.

골드만삭스 입사 낙방했지만…

변호사를 그만두고 금융가로 전직하고 싶었던 그는 모건스탠리와 골드만삭스, 딘위터 등에 입사 원서를 냈지만 모두 떨어졌다. 당연한 결과였다. 이들 IB는 미국 경영대학원(MBA) 졸업생도 들어가기 힘든 선망의 직장이었다. 비록 변호사로 일하며 기업 세무를 다루긴 했지만 금융 지식이 없던 그를 뽑아줄 IB는 많지 않았다. 대신 그는 1982년 헤드헌터를 통해 작은 원자재 투자회사인 제이아론에 영업직(세일즈맨)으로 들어갔다. 1년 전 골드만삭스에 인수된 회사였다.

블랭크페인 CEO의 뛰어난 능력 중 하나는 적응력이다. 그 자신도 “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능력 덕분”이라며 “새로운 직책, 환경에 놓일 때가 언제나 기회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그는 제이아론에 들어간 뒤 한동안은 사람들이 나누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적응하고 나자 무서운 속도로 실적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1억달러짜리 거래를 연이어 성공시켰고, 마침 골드만삭스에서 제이아론의 새 CEO로 자리를 옮긴 마크 윙켈만의 눈에 띄었다.

입사 2년 만인 1984년 윙켈만은 그를 6개 외환 세일즈 부문과 1개 외환 트레이드 부문을 모두 관리하는 자리에 앉혔다. 세일즈 출신이 트레이딩까지 관리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골드만삭스 본사에서 반대했지만 윙켈만은 밀어붙였다. 거들먹거리지 않고 털털한 그의 성격은 곧 트레이더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계속된 성과로 1988년 블랭크페인은 36명의 골드만삭스 파트너 중 한 명으로 올라섰다. 하루에 두세 갑씩 피우던 담배를 끊고, 은행원처럼 보다 깔끔하게 옷을 입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젊은 시절 날카로운 재치가 넘쳤던 그는 매력있고 겸손해졌다.

비주류 출신으로 골드만삭스 CEO에

블랭크페인은 원래 골드만삭스 CEO가 될 ‘혈통’이 아니었다. 당시 최고운영책임자(COO)였던 존 테인, 골드만삭스아시아 회장이었던 존 손턴 등 쟁쟁한 경쟁자가 많았다. 하지만 이들이 2003년 차례로 회사를 떠나면서 기회가 찾아왔다. 블랭크페인은 2003년 6월 49세의 나이로 골드만삭스 이사, 같은 해 12월 골드만삭스 COO로 임명됐다. 헨리 폴슨 당시 골드만삭스 CEO를 이을 유력 후계자로 올라섰다는 뜻이다.

2006년 미국 재무장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CEO 자리를 블랭크페인에게 물려준 폴슨은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사람은 자신을 되돌아보고 약점을 보완해야 한다”며 “그런 점에서 블랭크페인은 계속해서 발전해가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금융을 배운 적은 없지만 본능적으로 시장의 흐름을 감지하는 것도 그의 능력 중 하나다. 골드만삭스는 2008년 금융위기가 터지기 전 부채담보부증권(CDO)의 가치가 폭락할 것을 예상하고 CDO를 처분하는 한편 CDO에 대한 보험으로 신용부도스와프(CDS)를 구입했다. 메릴린치 등 월가의 다른 IB들은 리스크 평가를 컴퓨터 프로그램에 크게 의존했다. 인간의 자의적인 판단을 배제해 보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위험을 평가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블랭크페인 CEO는 컴퓨터프로그램이나 수식에만 의존하지 않고 리스크를 직접 관리했다. 골드만삭스에서 “모형에 그렇게 나왔어”라고 말하는 것은 해고를 부를 수 있는 실언이었다. 보통 푸대접받기 일쑤인 리스크 관리 부서 직원들을 중시한 것도 다른 IB와는 차별화된 모습이었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은 그의 신중한 성격을, 또 어떤 사람은 역사를 공부했던 배경을 요인으로 꼽는다. 스티븐 슈워츠먼 블랙스톤 CEO는 “그는 엄청나게 빨리 배우고 적응하는 사람”이라며 “세상을 보고 싶은 부분만 보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는 능력이 그의 뛰어난 점”이라고 평가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