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춘의 '국제경제 읽기'] '좀비 그리스 경제' 바람만 불어도 날아간다
지난 3일 그리스 증시가 5주 만에 어렵사리 재개장했다. 등락이 있었지만 1주일 동안 그리스 주식시장은 15% 넘게 급락했다. 업종별로는 그리스 경제의 두 축인 은행과 제조업의 하락 폭이 컸다. 과거 위기 경험국에서 증시가 폐장했다가 재개장할 때 흔히 나타났던 ‘체리 피킹’ 현상도 그리스 증시에선 보이지 않았다.

그리스 금융시장은 자금조달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은행 업무는 재개됐다. 하지만 자금이 고갈된 상황에서 구제금융으로 채워지는 자금을 활용해 예금인출만 감당하고 있을 뿐이다. 신규 예금으로 자금이 확충되는 것은 고사하고 아직도 ‘뱅크 런’ 현상이 멈추지 않고 있어 은행 업무가 언제 또 정지될지 위태롭다.

[한상춘의 '국제경제 읽기'] '좀비 그리스 경제' 바람만 불어도 날아간다
국채발행을 통한 그리스 정부의 재원조달은 꿈도 꾸기 어렵다. 전제조건인 국가신용등급이 받쳐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국민도 자국의 국채투자를 외면하고 있다. 회사채 발생도 중지됐다. 증시를 통한 기업공개(IPO)도 재개장 후 한 건도 계획돼 있지 않다.

금융시장을 통한 자금조달이 막혀 있으면 실물경제는 치명상을 입는다. 올해 1월 알렉시스 치프라스 정부가 출범한 이후 그리스 성장률은 마이너스로 다시 추락했다. 통계작업이 늦어지는 가운데 유일하게 발표된, 단기 경기 동향을 알 수 있는 7월 제조업지수는 30.2로 사상 최저수준이었다. 경기신뢰지수도 81.3을 기록해 3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유럽연합(EU)은 올해 그리스 경제 성장률이 최대 -4%대까지 추락할 것으로 예상했다. 국제통화기금(IMF) 등 대부분 예측기관도 비슷한 전망치를 내놓고 있다. 채무탕감과 같은 특단의 조치가 없으면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도 현재의 177%에서 2년 안에 200%까지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변제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경제는 5대 함정에 빠져 ‘좀비’라는 용어까지 등장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리스 정부의 의도대로 경제주체들이 반응하지 않아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정책 함정’에 빠졌다. 특히 위기 극복방안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금리인하 수단은 독자적으로 추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금리를 내리더라도 ‘유동성 함정’에 빠져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경제주체들이 과도한 부채에 시달려 소비나 투자를 하지 못하는 ‘빚의 함정’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경제구조를 개혁하는 문제도 최종 목표인 수익성, 경쟁력 개선 여부와 관계없이 구호만 외치는 ‘구조조정 함정’에 빠진 지 오래됐다. 이마저도 치프라스 정부가 들어선 뒤로는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어떤 국가든 이 같은 상황에 놓이면 경제주체들이 미래에 대해 느끼는 불확실성은 증대된다. 그 결과 예측기관은 특정 전망이 또 다른 전망을 불러일으키는 ‘불확실성 함정’에 빠진다. 재정위기 이후 그리스 성장률 전망치만큼 수정할 때마다 큰 폭으로 조정된 국가도 없다.

어느 하나 믿을 곳이 없다 보니 ‘대탈출 전염 현상’까지 일어나고 있어 그리스의 앞날이 더 우려된다. 자본통제 이후 외국 금융회사는 본국으로 속속 돌아가고 있다. 외국 자금은 규제에 가장 민감하기 때문이다. 그리스 기업과 ‘슈퍼 리치’도 조국을 등지고 있다. 주식거래도 영국으로 이전해 재개장한 이후 거래량이 중단 이전보다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특정 국가가 좀비 국면에 처해 있을 때는 ‘프로 보노 푸블리코(pro bono publico·‘공익을 위하여’라는 뜻의 라틴어)’ 정신을 발휘하는 것이 최후의 위기 극복책이자 경기회복 방안이다. 정부는 사익과 국익이 일치하는 정책을 내놓고, 일단 이런 정책이 추진되면 국민은 정부가 의도한 소기의 효과가 최대한 나타날 수 있도록 적극 후원해 줘야 한다.

그리스처럼 경제와 금융시스템이 동시에 붕괴하고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되는 국가에선 특정기관이나 특정인에 의존하기보다 국민 모두의 ‘집단 지성’을 구해 대처해 나가는 ‘시나리오 플래닝’ 기법이나 정부, 기업, 국민 모두가 주연이 되는 ‘M-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 국민은 ‘마이너스 베팅’에 열을 올린다. 마이너스 베팅이란 위기론에 돈을 거는 행위를 말한다. 투자자는 주가가 떨어지기를 기대해 선물매도에 나서고, 기업은 환율상승을 겨냥해 달러 사재기에 바쁘고, 은행은 대출금 회수에 열을 올린다. 각자의 입장에서 최선이 될지 모르지만 국가로는 악이 되는 ‘구성의 오류’에 빠져 있다.

그리스 경제를 놓고 “바람만 불어도 날아간다”는 표현까지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요즘 한국 경제를 그리스에 자주 비교한다. 그리스가 처한 여건에 우리 경제를 대비해 보면 왜 이런 우려가 나오는지 쉽게 알 수 있다.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