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협박에 '타협' 이끈 절반의 성공…긴축에서 성장 전환 끌어내
시리자 내 강경파 지지는 잃어…9월 이후 조기총선 가능성도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는 엄격한 재정 규율과 가혹한 긴축을 강요한 '골리앗' 독일에 끝까지 맞섰다.

독일은 13일(현지시간) 유로존 정상회의 공식 협상안에 사상 최초로 '한시적 유로존 탈퇴'(time-out from euro area)라는 충격적인 문안을 넣었지만 치프라스 총리는 16시간 넘는 끈질긴 협상 끝에 이 문구를 없애는 데 성공했다.

독일이 '한시적 그렉시트(Grexit)' 카드를 꺼낸 건 실제로 유로존에서 축출시키려는 것보다 신자유주의 패권에 저항한 급진좌파연합(시리자) 정권을 갈아치우려는 의도였다는 분석들을 고려하면 치프라스 총리가 버틴 것만으로도 패배한 것은 아니라는 평가가 가능하다.

치프라스 총리는 또 국유재산 500억 유로(62조6천억원)를 국외 펀드에 편입시켜 부채를 갚는 데 쓰라는 독일의 압박을 거부하면 그렉시트(Grexit)가 불가피했지만 완전히 굴복하지 않았다.

물론 프랑스 등의 도움을 받았지만 치프라스 총리는 이 펀드를 그리스에 두기로 했고 500억 유로의 절반가량은 성장을 위한 투자에 쓰겠다며 빚을 받아내려는 독일의 계획을 틀었다.

다만 치프라스 총리가 강조한 '금지선'인 부가가치세와 연금, 민영화, 노동관계 부문에서 채권단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해 "명예로운 타협"을 하겠다는 그의 계획은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그러나 지난 5개월에 걸친 협상은 대체로 치프라스 총리가 계획한 대로 진행됐다는 점에서 그가 백기를 들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치프라스 총리는 지난 1월 말 총선에서 승리하자 부패 척결과 채무 재조정을 내세웠고 개혁안은 채권단 '트로이카'가 아닌 주권국가인 그리스가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집권 직후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와 유럽중앙은행(ECB), 국제통화기금(IMF) 등 트로이카에 정면으로 맞선 그는 트로이카 실사단이 이메일로 재무장관에게 긴축안을 통보하는 방식이 아닌 최고위급 정치 지도자 간의 협상으로 해결하겠다고 밝혀왔다.

이런 계획대로 그리스의 2차 구제금융 마지막 분할금을 지원하는 협상이 통상 실무진에서 진행된 것과 달리 EU 정상회의와 유로존 정상회의 안건으로 올라갔고, 그리스는 지난 2월 개혁안을 스스로 만들어서 채권단에 제출하기로 했다.

특히 지난달 국민투표를 전후해 유럽 지도자들은 국민투표 반대는 유럽과 분열이라며 반발했지만 치프라스 총리는 반대는 채무 재조정이 담긴 '더 좋은 합의'라며 반대표를 호소했다.

월가와 주류 언론들이 국민투표 반대가 결정된 직후 그리스가 그렉시트에 한걸음 다가갔다고 평가했지만 치프라스 총리는 결국 채권단을 협상 테이블에 다시 앉혔고 이날 채무 재조정이 포함된 성명서를 채택하는 데 성공했다.

아울러 그리스 유명 관광지를 모두 팔아야 하느냐는 거센 반발을 샀던 500억 유로 펀드 제안을 성장을 위한 투자 목적으로 전환한 것도 적지 않은 성과다.

시장규제와 행정부문의 개혁 역시 시리자 정부가 정경유착의 부패를 척결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지 채권단에 굴복한 성격은 아니다.

시리자는 집권 직후 그리스의 고질적 병폐인 '올리가르히' 척결의 날을 세웠고 이를 위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손을 잡았다.

그리스 언론 등은 결국 긴축을 수용할 것이면서 국민투표는 왜 했느냐고 치프라스 총리를 비난하고 있지만 국민투표 카드는 채무 재조정 외에도 그렉시트를 막기 위한 선택이라는 측면도 있다.

치프라스 총리가 지난달 22일 채권단과 합의한 것을 두고 시리자 내 강경파가 반발해 그대로 의회로 가져갔다면 처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시리자 전체 의원은 149명, 연립정부 파트너인 독립그리스인당(ANEL)은 13명으로 모두 162명이나 이중 40명선으로 알려진 시리자 내 강경파인 '좌파연대'(Left Platform) 의원들이 반대했다면 전체 300명의 과반 찬성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민투표를 강행해 61%의 지지를 얻어내면서 채권단과 합의를 요구한 치프라스 총리에 힘이 실렸다.

아울러 치프라스 총리는 국민투표 이튿날 대통령궁에서 정당 대표들과 회동해 공산당과 극우 정당인 황금새벽당을 제외한 원내 정당 대표들이 정부를 지지한다는 공동성명서를 채택해 국회 입법 절차의 걸림돌을 해결했다.

실제로 지난 11일 개혁안 투표에서 좌파연대 17명이 지지를 거부했지만 1,2 야당의 전폭적 지지로 251명이 찬성하는 압도적 지지를 얻었다.

이날 치프라스 총리가 갖고 돌아가는 합의문은 11일 투표안보다 더 가혹하기 때문에 좌파연대 전부가 반대표를 던져 연정이 붕괴할 가능성도 있다.

다만 1, 2 야당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았기 때문에 3차 구제금융 협상 개시 조건인 4개 법안은 무난히 처리할 것으로 전망된다.

치프라스 총리는 우선 11일 투표에서 반기를 든 장관 2명을 교체하고 법안을 처리하고 나서 이 표결에 반대하는 의원들에 의원직 사퇴를 요구해 보궐선거를 치르거나 야당이 참여한 거국 내각, 조기총선 등의 선택지를 놓고 고심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총선을 실시하더라도 시리자 지지율이 제1야당보다 크게 앞서고 있어 현재로서는 치프라스 총리가 재집권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이스탄불연합뉴스) 김준억 특파원 justdust@yna.co.kr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