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도재 글로텍 회장이 가나 테마의 본사에서 가나 경제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영효 기자
임도재 글로텍 회장이 가나 테마의 본사에서 가나 경제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영효 기자
가나에서 원유저장시설 건설공사를 따내기 위해 국가석유청(National Petroleum Authority)을 찾은 미국과 유럽의 토목회사 관계자들은 ‘코피 임’이란 이름부터 듣는다. 세계 석유생산설비를 주무르는 이들로선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가나에서 원유 관련 플랜트사업을 하려면 코피 임이란 사람을 먼저 만나야 한다.

가나 최대 건설사 이끄는 ‘코피 임’

[한계돌파] 가나 원유플랜트 공사 '싹쓸이' …미국·영국도 사업하려면 이 남자 만나야
코피 임은 임도재 글로텍 회장(63)의 현지 이름이다. 코피는 가나 현지어로 ‘금요일’이란 뜻이다. 태어난 요일을 이름으로 쓰는 가나인의 풍속을 따라 금요일에 태어난 임 회장도 ‘코피’란 이름을 쓴다.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코피 아난도 그런 연유로 코피란 이름이 붙었다.

임 회장이 1998년 설립한 글로텍은 가나 최대 건설회사다. 수주실적과 장비보유 등 모든 부문에서 독보적인 1위다. 특히 저유소와 가스저장탱크 등 유류저장시설은 가나 전체 시장의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그는 현지에서 건설업계 대부로 불린다.

2010년까지만 해도 글로텍의 매출은 연 2500만달러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가나가 2010년 말 원유를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뛰기 시작해 지난해 5000만달러를 넘어섰다. 올해 목표는 1억달러. 이미 5월까지 수주목표의 60%를 채웠다.

글로텍이 원유저장시설을 토대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고 있는 배경에는 가나 정부 관료들과의 각별한 인연이 작용했다. 가나 정부 관료들이 해당 사업을 하려고 찾아오는 국내외 인사에게 임 회장을 먼저 만나보라고 권유할 정도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사연은 2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8개월 일하겠다” 했지만…

임 회장은 1993년 2월 SK건설 현장소장으로 가나에 첫발을 디뎠다. 가나 정부가 한국에서 받은 대외경제협력기금(EDCF·한국이 개발도상국의 산업발전을 지원하기 위해 1987년 설립한 기금) 차관으로 유류저장시설 세 개를 건설하는 현장을 맡았다. SK건설로선 처음으로 아프리카에 진출하는 사업이었던 만큼 해외근무 베테랑인 임 회장을 발탁했다. 임 회장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7년, 태국에서 1년 반의 해외 근무를 마치고 막 돌아온 참이었다. 8년 반 동안 ‘과부’나 다름없었던 아내는 “또 나갈 거면 이혼서류에 도장부터 찍으라”고 압박했다.

‘딱 8개월만 일하고 돌아오겠노라’고 아내를 다독이고 가나에 왔다. 회사로부터 ‘8개월 동안 터만 닦아주면 한국으로 돌아오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나서였다. 그가 부임한 SK건설 현장은 해안에서 860㎞ 떨어진 오지 중의 오지 볼가탕가 지역이었다. 여장을 풀기 무섭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죽기 살기로 일했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무조건 8개월 만에 끝내고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임 회장은 회고했다. 그게 도리어 고국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일임을 그때는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서 온 젊은 현장소장이 정말 지독하게 일한다’는 풍문이 돌기 시작했다. 현장 노동자들 사이에서 지역 주민에게로, 다시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소문이 들어갔다. 그 국회의원은 직접 몇 차례 현장을 방문해 임 회장을 눈여겨봤다. 그는 한국의 산업통상자원부 격인 에너지부의 차관(의원 겸직)이었다. 가나 에너지부는 임 회장의 공사현장인 유류저장시설의 발주처였다. 그렇게 사이먼 아빈쟈와의 만남이 시작됐다.

가나 에너지 프로젝트의 동반자

문제가 생겼다. 밤낮없이 일했는데도 공사는 1년4개월이 지나 끝났다. 약속했던 8개월의 두 배가 걸렸다. 한국으로 갔다가 이내 다시 가나로 돌아왔다.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SK건설에서 ‘가나 지사장’으로 승진발령냈기 때문이다. 가나 지사장으로서 그의 성과는 눈부셨다. 저유공장 증설공사 등 가나 정부가 발주한 대형공사 4개를 모두 따내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임 회장은 “죽어라 일만 했다. 내 가족과 청춘을 모두 가나에 바쳤다”고 말했다.

그 사이 그가 ‘사이먼 형님’이라고 부르던 아빈쟈 차관은 에너지부 장관이 됐다. 아빈쟈 장관은 7년 동안 에너지부 장관으로 일하면서 오늘날 가나 에너지 네트워크의 기반을 깔았다. 가나 전역에 유류저장시설을 짓고 송유관으로 연결하는 ‘2020 프로젝트’가 그것이었다. 1998년 어느 날 그가 임 회장을 불러 독자적인 플랜트건설사를 세울 것을 권했다. 대형 건설공사는 영국 건설사가 싹쓸이하던 때였다. 원유 생산과 에너지 독립을 꿈꾸던 가나에는 임 회장같이 현지 사정을 잘 알면서 건설 노하우도 풍부한 사람이 절실했다. ‘코피 임 신화’가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기부와 기술인력 양성에도 앞장

임 회장은 자신의 성공을 아빈쟈 장관과의 인연 덕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주변 사람은 주말마다 현지인의 장례식과 결혼식에 참석해 경조사를 챙기는 임 회장의 스킨십을 글로텍의 진정한 경쟁력이라고 평가한다.

안과가 없는 테마시(수도 아크라의 위성도시)에 안과병동을 지어주고 공립학교 5곳의 학생 150명에게 장학금을 꼬박꼬박 지급할 정도로 현지인과의 소통을 중시한다. 가나 글로텍 본사에 기숙사를 짓고 매년 두 차례 한국 대학생 인턴을 채용하는 등 고국과 인연의 끈도 놓지 않고 있다.

[한계돌파] 가나 원유플랜트 공사 '싹쓸이' …미국·영국도 사업하려면 이 남자 만나야
그는 현지 기술인력 양성에도 앞장서고 있다. 임 회장이 처음 가나에 왔을 때 가나는 산업 불모지였다. 금과 코코아가 수출품목 1~2위인 광업 및 농업국가였다. 건설현장에서 일을 시킬 숙련공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는 용접 배관 전기공을 길러내기 위해 기술훈련원을 열었다. 기술훈련원을 졸업한 현지인을 배관반장과 용접반장으로 독립시키고 하청공사를 맡겨 키웠다. 가나 건설시장에서 일 좀 한다는 사람들은 예외없이 이 기술훈련원 출신이다. 이들은 지금도 글로텍이 납기일을 지키기 어려워지기라도 하면 만사 제치고 달려와 임 회장을 돕는다.

임 회장은 “한국같이 경쟁이 치열한 곳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라면 세계 어디서든 성공할 수 있다”며 “한탕을 노리기보단 자식에게 물려줄 터전을 쌓는다는 자세로 접근하면 못할 일이 뭐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 임도재 회장이 말하는 가나 성공 팁

“한국의 성공사례를 모르는 아프리카人은 없다. 먼저 다가가면 마음을 연다”
“관급공사를 하려면 현지인과의 교류가 최우선”

→주말마다 경조사 챙기고, 라이언스클럽 로터리클럽 가입해 현지 사업가 및 관료들과 친분 쌓아
“가나에서 번 돈은 가나에서 써라”
→안과병동·치과병원 개설, 공립학교에 장학금 기부

테마(가나)=정영효 기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