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의 ‘메가톤급’ 시장 개입성 발언에 10일 엔화가치가 급등했다. 구로다 총재는 이날 중의원 재무금융위원회에서 “실질실효환율상 (추가로) 엔화가 약세로 간다는 건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좀처럼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중앙은행 총재가 환율 수준에 대해 말하는 것이 금기시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이날 구로다 총재의 말은 극히 이례적이며 엔저(低) 흐름에 제동을 걸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구로다 총재의 이 말 한마디로 이날 엔화가치는 올 들어 최대인 1.7엔가량 뛰었다.

엔화가치는 지난달 22일 재닛 옐런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의 연내 금리인상 시사 발언으로 하락하기 시작해 지난 8일엔 13년 만에 처음으로 달러당 125엔 아래까지 떨어졌다. 연내 130엔까지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퍼졌다.

구로다 총재는 지난 2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만난 뒤에도 “환율은 안정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말을 아꼈다. 하지만 불과 8일 만에 국회에서 실질실효환율을 거론하며 엔화가 너무 싸다는 뉘앙스의 말을 던졌다. 현재 엔화가치는 각국의 물가동향을 반영한 실질실효환율상 사상 최저 수준까지 하락한 상태다.

구로다 총재의 이 같은 발언은 일본 경제에 대한 ‘자신감’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분석이다. 아베 정부 출범 후 엔화가치는 40% 넘게 하락해 기업 실적개선과 경기 회복을 이끌고 있다. 올 1분기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은 기업 설비투자가 증가한 덕분에 전분기 대비 1.0%(연율 3.9%) 증가했다. 1년 만의 가장 높은 성장률이다. 오정근 건국대 특임교수는 “구로다 총재의 이번 발언 배경엔 일본 경제 회복세가 있다”며 “엔화 약세에 대한 해외 비판에 대응할 여유가 생긴 것”이라고 해석했다. 최근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선 달러 강세와 엔화 약세가 논쟁거리가 됐다. 일본의 성장률이 잠재성장률 수준을 회복한 만큼 이 같은 외교적 움직임에 호응할 여유가 생겼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추가적인 엔화가치 하락이 일본 경제에 실익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점을 의식한 발언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최근 일본 기업 사이에선 엔저로 인한 추가 이익 증가분이 미미할 것이라는 전망이 늘고 있다. 일본 기업들은 대부분 달러당 115엔대를 가정해 올 사업계획을 짜놨기 때문에 환율 변동성이 오히려 부담이 될 수 있다. 또 원자재를 수입해오는 중소기업과 서민들은 수입물가 상승에 따른 불만이 높아질 수 있다.

한국 경제 측면에선 앞으로 엔저 고민을 덜 수 있을지가 관심이다. 구로다 총재의 발언이 알려진 이날 오후 달러 대비 원화가치가 급등하는 등 시장 반응이 거셌다. 하지만 한국의 수출 경쟁력을 결정하는 원·엔 환율은 좀더 지켜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오 특임교수는 “달러 대비로는 원화가치 변동이 컸지만 엔화 대비로는 큰 변화가 없었다”며 “선진국에서 흘러나온 자금이 국내로 들어와 원화를 더 끌어올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경제연구부문장은 “엔화 약세가 한국 경제엔 좋은 소식”이라면서도 “엔저 걱정을 아직 덜 때는 아니다”고 말했다.

도쿄=서정환 특파원/김유미 기자 ceose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