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7월 미국 뉴햄프셔 브레턴우즈에서 열린 ‘브레턴우즈 회의’ 장면.
1944년 7월 미국 뉴햄프셔 브레턴우즈에서 열린 ‘브레턴우즈 회의’ 장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제안해 본격 추진 중인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설립에 대해 미국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운영의 투명성과 공정성이 의심된다”며 노골적인 반대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국은 물론 호주와 영국까지 56개 국가가 중국에 줄을 섰다. AIIB는 미국 주도의 세계은행(WB) 및 아시아개발은행(ADB), 국제통화기금(IMF)과 기능이 상당 부분 겹친다. 중국이 위안화를 국제 기축통화로 키우기 위한 첫걸음을 디뎠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치·외교뿐 아니라 국제금융시장에서도 G2(주요 2개국)의 기싸움이 본격화하고 있다.

중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달러 중심의 국제통화질서에 대한 도전 의지를 분명히 했다. 2009년 저우샤오촨 중국 인민은행장은 “달러화 대신 IMF 특별인출권(SDR)을 새 기축통화로 사용하자”고 제안해 기축통화 논쟁을 촉발했다.

미국외교협회 국제경제국장이자 선임연구원인 벤 스테일은 브레턴우즈 전투에서 “오늘날의 경제적·정치적 현실을 반영해 세계 최대 채권국인 중국과 최대 채무국인 미국이 환율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새로운 브레턴우즈 체제’를 만들지, 만들 수 있을지, 만들어야 하는지”를 화두로 던졌다. 이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저자는 달러화 중심의 국제통화체제를 발족한 ‘브레턴우즈 회의’를 되짚어봤다.
지난해 11월 베이징 APEC 정상회의에서 만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지난해 11월 베이징 APEC 정상회의에서 만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연합국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한창이던 1944년 7월1일 미국 뉴햄프셔 브레턴우즈에선 또 하나의 전투가 벌어졌다. 저자가 말하는 ‘브레턴우즈 전투’다. 그날 브레턴우즈의 마운트워싱턴호텔엔 44개국 대표가 모여들었다. 전쟁을 불러온 국가 간 ‘환율 전쟁’의 폐해를 막고 세계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안정적인 국제통화질서의 밑그림을 짜기 위해서였다.

[책마을] 케인스 KO시킨 화이트…달러를 세계 중심에 세우다
저자는 브레턴우즈 체제를 만든 두 주역인 미국 재무부 고위관리 해리 덱스터 화이트와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벌인 대결을 그렸다. 새로운 국제금융질서가 만들어지는 역사적 과정은 물론 각국의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회의 막전막후 이야기, 케인스와 화이트의 개인적 삶 등을 마치 소설을 써내려가듯 세밀하게 묘사했다. 화이트가 옛 소련의 간첩 역할을 한 과정과 그 영향도 흥미진진하게 기술했다.

당시 세계 최대 채권국인 ‘뜨는 해’ 미국과 최대 채무국인 ‘지는 해’ 영국은 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대 초부터 전후 금융 패권을 놓고 치열한 주도권 다툼을 벌였다. 전쟁 비용 등으로 파산 위기에 몰린 영국은 당대 최고 지성으로 추앙받던 케인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케인스는 세계 중앙은행인 국제결제동맹(ICU)을 설립해 회원국들에 ‘방코르(Bancor)’라는 일종의 초국적 통화를 쓰게 하는 ‘케인스 플랜’을 내놨다. 세계 최대 경제국인 미국이 달러를 기축통화로 삼아 세계 경제를 주무르는 사태를 막으려는 구상이었다.

[책마을] 케인스 KO시킨 화이트…달러를 세계 중심에 세우다
화이트는 달러가 공식적인 기축통화로 등극하길 원했다. 방코르를 배제하는 대신 회원국이 예치한 통화를 안정화기금으로 빌려주는 ‘화이트 플랜’을 제시했다. 결제 화폐는 금과 ‘금태환 통화’였다. 두 사람은 각각 나라를 대표해 2년여간 밀고당기는 줄다리기를 치열하게 벌였다. 저자는 “두 사람의 논쟁은 전투였다”며 “수차례 회의 자체가 무산될 지경까지 갈등이 치닫곤 했다”고 묘사했다.

최종 결전지는 브레턴우즈 회의장. 전투는 결국 화이트의 승리로 끝났다. 화이트의 치밀하고 세심한 전략도 승리의 요인이었지만 양국의 경제력 차이가 승패를 갈랐다. 그 결과 금 1온스를 35달러에 묶고 다른 통화는 달러에 고정해 미국달러만 금과 바꿀 수 있게 하는 달러 연동 금본위제가 등장했다.

저자는 맺음말에서 1940년대와 오늘날의 세계 역학 구도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오늘날 중국과 미국 사이의 채권·채무 관계는 1940~1950년대 미국과 영국 간 관계와는 아주 다르다. 무엇보다 중국은 1940년대 미국과 달리 국제통화체제를 바꿀 브레턴우즈 회의 같은 모임을 지휘할 위치에 있지 않다. 오늘날 미국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1940년대 영국처럼 중국에 간청해야 하는 처지가 아니다. 미국은 여전히 자국 통화인 달러를 발행해 부채를 상환하고 달러화는 전 세계 외화보유액의 60%를 차지한다.

저자는 미국의 자신감을 드러내는 한편 두 나라의 팽팽한 긴장 관계가 한동안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그는 “고질적인 무역 불균형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미국과 중국이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었을 때의 후폭풍이 엄청나게 크다고 판단하는 한, 서로 협력하는 새로운 국제통화기구는 탄생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