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국무부 "아베, 고노담화 계승 언급 주목한다" 논평
일각, 美 아베연설 계기 '한일정상회담' 압박 가능성 거론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9일(이하 현지시간)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내놓은 과거사 언급을 놓고 미국 내에서 역풍이 불고 있다.

미·일 동맹의 격상을 한껏 부각시키며 환영 일색이던 버락 오바마 행정부도 이 같은 기류를 의식한 탓인지 과거사 문제만큼은 논평의 수위를 조심스럽게 조절하는 분위기다.

아베 총리를 향해 진정한 사과를 촉구하는 연명서한에 서명했던 스티브 이스라엘(민주·뉴욕) 하원의원은 이날 논평을 내고 "아베 총리의 연설에 반성과 희생자들에 대한 존중이 없었던 것이 매우 실망스럽다"며 "아베 총리는 기회를 놓쳤다"고 비판했다.

이스라엘 의원은 전날 한인단체 관계자들과 함께 아베 총리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여했다.

미국 워싱턴 정치전문지인 '롤 콜'은 이날자 1면 기사에 "어제 아베 총리의 연설은 완벽하게 수긍할만한 것이었지만, 한가지 눈에 띄게 빠진 것이 있다"며 "바로 위안부 문제에 대해 명시적으로 사과하라는 요구를 회피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존 페퍼 미국 '외교정책포커스' 소장은 30일 허핑턴포스트에 실은 기고문에서 "아베 총리는 의도적으로 위안부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며 "우리의 행동이 아시아의 국민들에게 고통을 안겨다 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는 곧바로 눈을 무역과 안보문제로 돌렸다"고 지적했다.

페퍼 소장은 "독일에서는 홀로코스트 부정이 범죄이지만 일본에서는 반대로 2차대전때의 범죄를 부정하는 것이 수용될 뿐만 아니라 일부 정치인들에게 선거 승리전략이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아베 총리의 과거사 입장을 바꾸려면 (과거를 부정하는데 대한) 비용을 높이거나 그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해야 한다"며 "워싱턴은 아베 총리가 보통국가로서의 외교관계를 원한다면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일본이 죽었고 역사문제를 영원히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고 밝혔다.

래리 닉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연구원은 연합뉴스에 "위안부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노담화의 역사적 정확성을 인정하는 것"이라며 "그러나 아베 총리가 단순히 계승한다고 말함으로써 적극적으로 고노담화를 지지하는 데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닉쉬 연구원은 특히 "아베 총리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 정부와 군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을 회피했다"고 비판하고 "우리는 아베 총리가 귀국하고 나서 무슨 말을 할지 지켜봐야 한다"며 "과거에도 아베 총리는 해외순방 중의 과거사 발언을 뒤집은 바 있다"고 강조했다.

닉쉬 연구원은 "올 상반기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방문 때 박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은 고노담화가 역사적으로 정확하다고 선언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 버클리대 일레인 김 교수는 이날 미국 CBS 방송에 나와 "아베 총리는 일본의 어두운 역사가 사라지고 미국 교과서에서 실린 역사적 내용이 다시 쓰여지길 바라고 있다"며 "이 같은 일은 어리석은 일이며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런 기류 속에서 오바마 행정부는 아베 총리의 과거사 언급에 대해 직접적인 평가를 하지 않은 채 "주목한다"(take note)는 선의 중립적 입장을 내놓고 있다.

한·일 간의 과거사 갈등을 조기에 매듭짓고 싶어하는 미국이지만, 한국의 부정적 반응과 미국 내의 비판 기류를 마냥 외면할 수만은 없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패트릭 벤트렐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연합뉴스에 논평을 보내 "우리는 일본이 더욱 적극적으로 세계평화와 번영에 기여하겠다는 아베 총리의 비전을 환영한다"며 "특히 우리는 아베 총리가 전후 미일 관계의 화해에 대해 긍정적 메시지를 보낸 것을 평가한다"고 밝혔다.

벤트렐 대변인은 그러면서 아베 총리의 과거사 언급에 대해서는 "우리는 아베 총리가 고노담화를 포함해 역대 총리들에 표현된 역사인식을 계승한다고 언급한 대목을 주목한다"고 밝혔다.

국무부도 "우리는 아베 총리의 2차대전 이후 미일 관계의 화해와 관련해 건설적 메시지를 보낸 것을 평가한다"면서 "우리는 과거사와 관련해 전직 총리들에 의해 표출된 견해들을 지지하겠다는 언급을 주목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눈여겨볼 대목은 미국 조야 일각에서 아베 총리의 연설 이후 한·일 관계 악화의 근원적 요인이 되는 과거사 문제를 적당히 매듭지으려는 움직임이 만만치 않은 점이다.

특히 올 상반기로 예상되는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를 계기로 미국이 한국에 대해 한·일 정상회담을 조속히 개최하는 쪽으로 압박을 가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칼 프리도프 시카고국제문제협회 연구원은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아베 총리의 발빠른 대미 외교로 불편한 한일 관계를 개선해야 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부담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박 대통령은 6월 미국을 방문할 때 미국이 한일 관계 개선을 촉구할 것이라는 데 대비해야 한다"며 "만약 박 대통령이 한일 정상회담 개최를 거부한다면 아베 총리의 역사관이 아니라 한국의 고집이 (관계개선의) 문제라는 인식이 더 커질 것"이라고 밝혔다.

대표적 지일파 전문가인 마이클 그린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일본석좌는 "오바마 행정부 내의 지배적인 견해는 위안부 문제가 언급되지 않았지만 기대했던 것보다 많은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라고 소개하고 "한국이 대화를 통해 긍정적인 진전을 이뤄내고 일본의 전향적인 조치를 인정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같은 연구소의 빅터 차 한국석좌는 "아베 총리가 직접 고노담화를 수정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새롭고 주목할만하다고 본다"며 "위안부 문제는 오로지 정상회담을 통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차 석좌는 이어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 사이에 정상회담이 곧 열릴 것이라고 자신하지 못하지만, 다양한 형태의 다자무대에서 양자협의의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앨런 롬버그 스팀슨센터 선임연구원은 "아베 총리의 과거사 사과는 애초부터 기대하기 어려웠다"면서 한국에 대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필요한 것은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브루스 클링너 헤리티지재단 연구원은 "아베 총리에게 한일 관계 개선의 공이 여전히 넘어가 있었지만, 한국도 일본이 밟아야 할 특정한 조치를 구체적으로 언급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워싱턴연합뉴스) 노효동 특파원 rhd@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