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가 23일 별세하자 한 가족이 싱가포르 시내 공공기관에 마련된 추모시설에서 애도하고 있다. 싱가포르EAP연합뉴스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가 23일 별세하자 한 가족이 싱가포르 시내 공공기관에 마련된 추모시설에서 애도하고 있다. 싱가포르EAP연합뉴스
23일 타계한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91)는 강력한 경제개발 정책으로 작지만 강하고 잘사는 싱가포르를 만든 인물로 평가받는다. 시장에 기반한 경제모델을 추진하면서도 서구식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법치와 강력한 리더십에 바탕을 둔 ‘아시아적 발전모델’을 강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시대를 만든 ‘거인’

리 전 총리는 31년간의 총리 재임 기간 싱가포르의 정치·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동시에 달성했다. 싱가포르는 그의 리더십 아래 세계적 금융 및 물류 중심지로 거듭났고 부정부패가 거의 없는 깨끗한 사회로 발전했다. 지난해 싱가포르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5만6113달러로 세계 8위, 아시아 1위다. 동갑내기 외교계 거물인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그를 ‘시대를 만든 인물’이라고 극찬했다.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연방으로부터 독립한 1965년, 싱가포르는 부존자원은커녕 마실 물조차 부족해 이웃 말레이시아에서 사와야 할 정도로 상황이 암울했다. 독립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로 취임한 그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국가 발전의 밑그림을 그렸다. 기업에 대한 규제 완화와 세금 감면, 강력한 국가 조직을 활용한 질서 구축 등을 통해 경제 발전을 추진했다.

인구 500만 남짓의 도시국가인 싱가포르가 내수 중심 경제체제를 구축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완전한 대외 개방 경제체제를 지향하며 유럽, 미국 등 선진국과 교역했다. 당시 야당은 ‘제국주의 국가가 제3세계를 착취한다’는 종속이론을 들어 그의 경제정책에 반대했지만 리 전 총리는 “이론도 먹고살 수준이 돼야 논할 수 있다”며 밀어붙였다.

집권하는 동안 재정 안정화, 서민주택 보급, 공직비리조사국 설치, 해외투자 유치 등의 정책을 시행했다. 싱가포르 항만공사를 설립해 세계 일류 수준의 컨테이너항구를 건설했고, 1970년대 후반 석유파동 속에서도 창이국제공항을 만드는 등 주요 사업에는 과감한 투자를 단행했다.

이 같은 장기적 안목의 투자로 싱가포르는 물류 중심지, 항공의 요충지로 자리잡았다. 그는 또 세계적인 금융회사를 유치해 싱가포르를 동남아 금융 중심지로 탈바꿈시켰다.

○“국가가 개인에 우선한다”

싱가포르는 세계에서 가장 국가 브랜드 이미지가 뚜렷한 나라로 꼽힌다. ‘부패가 적고 거리가 깨끗한 국가’라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껌만 뱉어도 벌금을 부과하고 외국인에게도 태형으로 처벌하는 나라’라는 부정적 이미지도 적지 않다. ‘국가가 개인에 우선한다’는 리 전 총리의 철학이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는 경제개발 과정에서 착취나 인권침해 논란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노조활동을 인정하지 않고 임금 인상을 억제했지만, 성과급 제도를 적극 도입했다. 유능한 인재의 공직 진출을 적극 유도했고, 공무원들이 부정부패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높은 수준의 급여를 지급했다.

리 전 총리는 1923년 영국 식민지 시절 싱가포르로 이주한 중국계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1942년 태평양 전쟁을 겪으며 집안 형편이 급속하게 기울어 생활전선에 내몰렸다.

종전 뒤 1949년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 소속인 피츠윌리엄 칼리지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1951년 귀국해 변호사로 개업했으며 1954년 인민행동당(PAP)을 창당하고 사무총장에 올랐다. 1990년 고촉통 전 총리에게 총리 자리를 물려줬다. 2010년 세상을 떠난 부인 콰걱추 여사와 2남 1녀를 뒀다. 그의 맏아들인 리셴룽(李顯龍) 총리(63)가 2004년부터 제3대 총리로 싱가포르를 이끌고 있다.

그의 유일한 유언은 “내가 세상을 떠나면 살고 있는 집을 헐어 버려라”라는 것이었다. 자신이 살던 집이 국가 성지가 되면 주변 건물을 높게 올릴 수 없게 돼 이웃들이 고통받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 리콴유 어록

[리콴유 타계] 법치·강력한 리더십…가난한 어촌을 소득 6만弗 국가로 만든 '거인'
“나는 여론조사나 인기투표에 연연하고 구애받은 적이 없다. 지지율 등락에 관심을 갖는 것은 지도자의 일이 아니다.”

-1997년 회고록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에서

“국민의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될지,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될지 사이에서 나는 항상 마키아벨리가 옳다고 믿었다. 아무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나는 무의미한 존재다.”

-1997년 회고록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에서

[리콴유 타계] 법치·강력한 리더십…가난한 어촌을 소득 6만弗 국가로 만든 '거인'
“민주주의는 신생 개발도상국에 좋은 정부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아시아의 가치가 미국인이나 유럽인의 가치와 반드시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 중국적인 문화를 배경으로 한 아시아인으로서 나의 가치는 정직하고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정부를 만드는 데 있다.”

-1992년 11월 일본 도쿄에서 한 연설 중

“나는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개입한다는 비난을 종종 듣는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싱가포르는 오늘날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한 줌의 후회 없이 말하건대, 누가 거리에 침을 뱉는지, 어떤 언어를 쓰는지, 이런 문제에까지 개입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경제적 번영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1986년 독립기념일 발언 중

강동균 기자 kd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