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업 현금 적정선 이상 보유
'충격요법' 써서라도 돈을 돌려야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
[한상춘의 '국제경제 읽기'] 한국 경제 新4低 근원…'돈이 늙고 썩는다'

얼마 전 국내 제일의 금융전문그룹 회장이 “돈이 늙는다”고 말해 한국 경제에 화두를 던진 적이 있다. 그 후 ‘돈이 썩는다’는 표현까지 나올 정도다. 돈이 돌지 않으면 사람의 몸처럼 심장에서 멀리 떨어진 손발부터 썩어가는 증상이 나타난다. 한국 경제 내부에서 대기업보다 중소기업, 부유층보다 서민층일수록 어렵다 못해 쓰러지는 현상이 그것이다.

특정 국가에서 돈이 늙고 썩는 정도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경제활력 지표로 통화유통 속도와 통화승수가 있다. 통화유통 속도는 일정 기간 한 단위의 통화가 거래를 위해 사용된 횟수를 말한다. 이 지표가 떨어진다는 것은 돈이 제대로 돌지 않아 그 나라 경제가 활력을 잃고 조로화되고 있음을 뜻한다.

돈의 흐름이 얼마나 정체돼 있는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지표가 통화승수다. 돈의 총량을 의미하는 통화량을 중앙은행이 공급하는 본원 통화로 나눠 산출한다. 이 지표는 국민의 현금보유 성향과 예금은행에 대한 지급준비율 등에 의해 결정되는데, 현금보유 성향과 지급준비율이 작을수록 통화승수는 커진다.

[한상춘의 '국제경제 읽기'] 한국 경제 新4低 근원…'돈이 늙고 썩는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통화승수는 지난 8월에 19.4배로 이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2001년 12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통화유통 속도도 올해 2분기 0.74로 떨어져 경쟁국뿐 아니라 경제발전단계가 훨씬 앞서가는 미국보다 낮다. 돈이 돌지 않음에 따라 단기 부동자금도 사상 최대 규모인 750조원을 넘어섰다.

돈이 늙고 썩는 가장 큰 원인은 한국 기업이 지나치게 현금을 많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한국 기업의 현금보유는 459조원에 달해 국내총생산(GDP)의 34%에 이른다고 추정했다. 미국의 11% 대비 3배, 독일의 20%에 비해서는 1.7배 높은 수준이다. 한국 기업이 보유한 현금만 풀어도 GDP가 2%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한국 기업이 현금을 쌓아 놓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요인에서 비롯된다. 가장 큰 요인은 미래 불확실성을 극복하려는 ‘야성적 충동’이 악화됐기 때문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한국 기업의 자본투자 증가율은 연평균 1%대에 불과해 실질적으로 정체돼 왔다. 잠재성장률이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직간접 자금 중개 기능이 약화되고 있는 것도 돈이 늙고 썩은 원인이다. 현금보유를 많이 한 기업이 자체적으로 투자하지 않으면 필요한 기업에라도 흐를 수 있어야 한다. 한국 금융회사의 이기주의와 금리체계 약화 등으로 실물과 금융 간 연계성이 크게 떨어진 상황에서는 시장 기능에 의한 자금의 효율적 배분을 기대할 수 없다.

일부 개인들이 돈을 아예 시장에서 퇴장시키고 있는 것은 더 우려되는 일이다. 저금리와 금융상품 수익률이 떨어지고 있는데다 각종 불안심리까지 겹치고 있기 때문이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지하자금 규모도 커져 2012년 1분기 71.6%까지 상승했던 5만원권 회수율이 올해 3분기에는 10%대로, 신권이 발행되면 거의 돌아오지 않는 수준까지 떨어졌다.

한국 기업과 개인이 투자와 소비에 너무 신중한 태도를 보이면 오히려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도로가 겁 많은 운전자로 가득차면 더 위험해지고, 아이를 키울 때 세균에 너무 민감해지면 면역력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특히 대기업과 부유층의 돈이 돌지 않으면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까지 겹쳐 중소기업과 서민층은 더 어려워진다.

현 시점에서 기업과 개인에 맡겨 놓으면 돈이 돌기가 쉽지 않다. 충격요법을 써서라도 인위적으로 돌려야 한다. 2기 경제팀은 기업이 보유한 현금을 임금과 배당 인상을 통해 개인에게 흐를 수 있도록 했다. 수익성 악화가 우려된다면 투자하라는 얘기다. 개인이 보유한 현금은 정부가 대신 돌려주겠다는 취지에서 부유세 도입안을 놓고 논쟁이 한창이다.

경제에 산소를 공급해 주는 혈액인 돈이 돌지 않고 늙으면 그 나라 경제는 멈출 수밖에 없다. 이미 한국 경제는 저투자·저성장·저물가·저금리 등 이른바 ‘신4저(新4低)’ 현상이 정착되는 추세가 뚜렷하다. 대외적으로는 선진국을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후발국에 추격을 당하는 ‘너트 크래커 형국’에 직면한 지 오래됐다.

한국 경제처럼 돈이 늙고 썩을 때는 경기침체 등 당면한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단순히 경기순환상의 처방만으로 한계가 있다. 늙고 썩어가는 돈부터 돌려 젊게 해야 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정책 신호에 대한 국민의 반응도를 끌어올리고, 그 위에 과감한 재정과 통화정책을 추진해야 경기순환적인 단기과제를 해결할 수 있다. 중장기적으로 지속적인 성장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를 이끌어가는 국가의 성장 동인을 감안해 거시경제의 틀을 다시 짜야 한다. 그 틀 안에서 강력한 개혁과 구조조정을 통해 병목현상을 줄여 경제주체 간에 돈이 잘 돌게 하고, 경제연령을 젊게 해야 한국 경제가 ‘퀀텀 점프’할 수 있다.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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