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정희 기자  ljh9947@hankyung.com
일러스트=이정희 기자 ljh9947@hankyung.com
1992년 미국은 뜻밖의 동성애 논란에 휩싸였다. 한 의류업체가 두 해군 병사가 군함을 배경으로 키스하는 사진을 담은 인쇄광고를 내보냈기 때문이다. 일명 ‘두 수병의 키스’라고 불리는 이 광고는 당시 미국 해군의 동성애자 입대 불가 방침을 직접적으로 비판해 파란을 일으켰다. 지금은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상당 부분 개선됐지만, 이 광고를 만들 때만 하더라도 사회에서 동성애자를 배척하고 격리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성적 소수자를 포용하는 이 회사의 용기에 대중은 환호했다. 고급 청바지 브랜드 ‘디젤’로 널리 알려진 OTB그룹의 이야기다.

OTB는 ‘오직 용기 있는 자들(Only The Brave)’의 약자로 ‘용기 있는 행동’을 강조하는 회사의 모토를 그대로 옮겨놓았다. ‘두 수병의 키스’ 사건은 이 회사의 정체성을 가감없이 보여준 사례다. 이렇게 용기를 강조하는 데는 설립자 렌조 로소의 영향이 크다. 그는 “보통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에 도전하고, 이전에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용기가 성공의 원천”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신념에 따라 로소는 팔과 발목에도 ‘Only The Brave’라는 문신을 새겼다.

○헤진 청바지로 시작

로소는 1955년 이탈리아 북동부의 작은 마을 파투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패션 취향을 갖고 있었다. 새 옷을 좋아하는 또래와 달리 오래되고 낡은 느낌의 옷을 좋아해 고등학교 때부터 집 농장 안마당의 시멘트 바닥에 청바지를 문질러 낡은 느낌이 나게 만들어 입었다. 직물제조학교를 졸업한 그는 1975년부터 자신의 옷을 스스로 만들어 입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78년 친분이 있는 제조업자들과 함께 현재 디젤의 전신이 된 ‘지니어스 그룹’을 설립했다.

회사 설립 이후 그는 새 옷이지만 낡은 느낌이 나는 ‘빈티지’ 의상을 팔면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스러운 빈티지 제품을 만들기 위해 화학제품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일일이 청바지의 물을 빼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의 제품을 만들었다. 당시 청바지의 대명사 리바이스가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로소는 자신이 만든 청바지가 리바이스의 두 배 가격에 팔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그를 업계 관계자들은 미치광이 취급했다. 멀쩡한 청바지를 낡고 헤지게 만들어 비싸게 팔겠다는 그를 보며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가 만든 빈티지 스타일의 청바지는 날개 돋친듯 팔려나갔다. 1985년 회사의 매출은 전년도의 280만달러에서 1080만달러로 급증했다. 그의 아이디어가 성공하자 로소는 지니어스 그룹의 동업자들로부터 회사 지분을 모두 사들여 완전히 자기 회사로 만들고 독자경영을 시작했다.

이후 로소는 “디젤은 나의 회사가 아니라 나의 삶”이라고 얘기할 만큼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회사를 키웠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OTB그룹은 현재 디스퀘어, 마크제이콥스 등 15개의 패션 라인을 갖추고 세계 80개국에 400여개의 매장을 거느린 회사로 성장했다. 세계적으로 6000여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으며, 2012년 기준 18억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회사의 성공으로 로소는 순자산 30억달러의 억만장자가 됐다.

○“바보가 돼라”

로소의 좌우명은 ‘바보가 돼라’이다. 그는 “똑똑한 사람은 현실을 보지만, 바보는 현실 그 이상을 보는 법”이라고 말한다. 패션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위험을 감수하는 바보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로소는 1996년 청바지의 본고장 미국에 진출할 때 뉴욕의 대형 리바이스 매장 바로 앞에 디젤 매장을 세우며 도전장을 내밀었다. 언뜻 보기에도 도저히 성공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모험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디젤 청바지를 다른 브랜드보다 두 배 비싸게 팔기로 결정했다. 당시 미국에서 가장 비싼 랄프 로렌 바지가 54달러였던 반면, 디젤 청바지 중 가장 싼 게 100달러였다. 당시에는 모두가 바보 같은 짓이라며 손가락질했지만, 결국 이런 시도가 디젤을 세상에서 가장 창조적인 패션 브랜드로 성장시켰다.

로소는 인재 등용에도 이 원칙을 적용한다. 그의 인재 등용 철학은 ‘2등을 뽑자’이다. 로소는 “이미 성공한 사람들은 제자리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는 반면, 성공에 목마른 사람들은 훨씬 더 단호하고 열정적”이라며 “의욕에 불타고 있는, 그리고 아직 실현시킬 꿈을 가지고 있는 ‘넘버2’를 찾으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이미 잘나가는 스타가 아니라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인재에 대한 선호는 디젤의 국제재능지원(ITS) 프로그램에서 잘 나타난다. 이 프로그램은 세계의 다양한 패션 스쿨과 협력해 열심히 노력하는 유망한 인재를 발굴해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게 지원하고 있다.

디젤의 광고에도 로소의 ‘바보 철학’이 반영돼 있다. 광고에서 상품을 소개하지 않는 대신 우스꽝스러운 사진을 보여주거나, 회사와 전혀 관계없는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는다. 로소는 “상품을 직접적으로 홍보하는 광고는 그 브랜드의 상품이 지속적으로 잘 팔리게 만들지 못한다”며 “광고는 한바탕 웃기 위해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디젤은 ‘두 수병의 키스’ 외에도 열대 우림이 된 런던 테임스강 일대, 사막이 돼버린 만리장성,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까지 물이 차오른 뉴욕 등 파격적인 이미지를 통해 ‘환경 문제에 대해 고찰하는 브랜드’라는 긍정적 인식을 심기도 했다.

○여행이 ‘창조적 영감’의 원천

‘디젤’이라는 브랜드 명칭은 ‘기존에 없던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의미한다. 처음 디젤이 탄생한 1978년은 중동발(發) 석유파동으로 전 세계가 고통받고 있을 때였다. 로소는 “당시 휘발유의 대안으로 각광받았던 디젤처럼, 기존의 것들을 대체할 창조적인 기업이 되자는 의미에서 ‘디젤’을 택했다”고 말했다.

국제적 패션 브랜드인 디젤의 본사가 아직도 고향 근처인 이탈리아 베테토주 바사노 델 그라파 근교에 있는 것도 창조적 기업에 대한 로소의 생각이 반영돼 있다. 로소는 “본사를 대도시로 이전하면 새 동업자를 구하거나 중요한 계약을 성사시키는 것이 한층 수월할지 모르지만, 고향 인근의 친근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는 디젤의 창의력을 고취시키고 공동체 정신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비단 로소가 성장한 곳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로소는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패션쇼를 보러 다니는 대신, 길거리를 돌아다니거나 디스코장 등을 돌아다니며 아이디어를 얻는다. 특히 본사가 지방에 있는 대신 전용기를 타고 세계 곳곳을 누빈다.

박병종 기자 dda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