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49주년 - 기로에 선 신흥국…20억 시장을 가다] 중산층 소비 눈뜰 땐 세계경제 이끌 '엔진'
“향후 5년간 구제금융을 신청할 가능성은 없다.” 라구람 라잔 인도중앙은행(RBI) 총재(50)는 지난 11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 연차총회에서 “인도 경기는 바닥을 쳤다”며 이렇게 자신했다. 루피화 가치가 사상 최저치로 폭락하면서 인도가 다시 구제금융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외신 보도가 쏟아졌던 것이 불과 한 달여 전 일이다. 그동안 인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인도 서부 란장가온에 있는 LG전자 세탁기 공장
인도 서부 란장가온에 있는 LG전자 세탁기 공장
우선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변수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벤 버냉키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은 지난달 18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마친 뒤 3차 양적완화 기조를 유지한다고 발표했다. 당초 지난달부터 실시될 것으로 예고됐던 양적완화 축소 조치가 연말 이후로 연기된 것이다.

하지만 인도 환율이 안정되기 시작한 시점은 훨씬 이전부터다. 평소 달러당 52~54루피에서 움직이던 인도 통화가치가 사상 최저치(68.83루피)로 떨어진 건 지난 8월28일.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 예고로 고질적인 경상적자 문제가 불거진 탓이었다. 이후 루피화는 지난달 3일(67.73루피)을 고비로 안정을 되찾으면서 지난 15일 기준 61.85루피까지 절상됐다. 루피화 움직임이 반전되기 시작한 지난달 4일은 라잔이 RBI 총재로 취임한 날과 정확히 일치한다. IMF 수석이코노미스트 출신이자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정확히 예측했던 스타 경제학자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준다.

○12억의 거대 인구 & 엘리트 군단

라잔 효과는 인도 엘리트 집단의 저력을 새삼 실감케 한다. 라잔의 ‘데자뷔’는 만모한 싱 총리(81)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사) 및 옥스퍼드대(박사) 출신인 그는 1991년 인도가 외환위기를 맞았을 때 재무장관에 발탁돼 개방과 규제완화를 주도하며 위기 극복에 기여했다. 이후 인도 경제가 2007년까지 연 7~10%의 고속 성장이 가능했던 것도 싱 총리의 경제개혁이 먹혀들어간 덕이다. 엘리트 파워는 1인당 국민소득이 1500달러에 불과한 인도가 우주개발과 정보기술(IT) 강국이라는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이기도 하다.

12억명에 이르는 거대 인구 역시 강점으로 꼽힌다. 인도 중산층이 두터워질 경우 구매력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인도 소비자들의 구매 수준은 아직 생필품 단계에 머물러 있다. 소득 증가로 자동차나 세탁기 등 내구재 소비 확대가 본격화되면 중국에 버금가는 내수 규모를 갖추게 된다. 조지 콜 골드만삭스 이코노미스트는 “다가올 10년간 인도 등 신흥국들 수입이 점차 늘면서 생필품뿐 아니라 내구재 소비로 이어져 글로벌 경제성장을 이끌 것”이라고 내다봤다.

인도에 묻혀 있는 풍부한 자원도 성장 잠재력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석탄의 경우 2011년 기준 매장량이 2850억t에 이른다. 세계 4위 수준이다. 생산량은 연간 5억~6억t 선으로 지금 추세라면 500년 이상 채굴이 가능한 어마어마한 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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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중동·아프리카 잇는 ‘가교’

인도대륙은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 등 3개 대륙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다. 이 같은 입지여건은 글로벌 제조업체들이 끊임없이 인도 진출 기회를 엿보는 원동력이다. 현대자동차의 인도 첸나이 공장, LG전자의 란장가온 공장 등은 아프리카나 중동 수출의 전초기지로 활용되고 있다. 델리에서 만난 김언수 현대차 판매마케팅부장은 “내수시장뿐 아니라 주변 국가를 대상으로 한 수출물량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엘리트 파워와 지리적 이점을 살린 인도 외교력도 만만치 않은 수준이다. 식민지 시절 겪은 불행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 시절부터 비동맹주의와 균형주의를 바탕으로 한 등거리·실리외교를 철칙으로 삼고 있다. 미국과 교류하면서 미국 눈치를 보지 않고 이란의 원유를 수입하는 국가가 인도다.

서남아시아 맹주로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 더불어 4대 열강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전문가들은 인도의 잠재력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결국 정치 개혁이 급선무라고 입을 모은다. 라잔 총재도 그의 저서 ‘폴트라인’에서 “거의 모든 금융위기는 정치적 요인에서 비롯된다. 강력한 정치적 힘이 뒷받침된 개혁이 있어야 경제적 균형을 회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델리·뭄바이·푸네=이정선 기자 sunee@hankyung.com

■ 특별취재팀

브라질=남윤선 기자, 박래정 LG경제硏 수석연구위원
인도네시아=김보라 기자, 이지선 선임연구원
멕시코=노경목 기자, 김형주 연구위원
터키=주용석 차장대우, 정성태 책임연구원
인도=이정선 차장대우, 강선구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