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연구중심 대학 총장 회의] "디지털 시대 혁신 대비 못하는 대학은 사라진다"
1억1900만유로(약 1728억원). 스위스 로잔공대(EPFL)가 앞으로 10년 동안 매년 유럽연합(EU)으로부터 받게 될 연구 자금이다. 로잔공대가 주도하는 ‘인간 뇌 프로젝트(HBP)’가 올초 EU 미래유망과학위원회가 선정하는 인류의 미래를 열어갈 6개 연구 사업 중 하나로 결정되면서다.

이 프로젝트는 인간의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슈퍼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뇌 질환을 치료하는 약을 개발하거나 인간의 두뇌를 닮은 컴퓨터와 인공지능(AI)을 개발하는 데 초석이 될 전망이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엔 또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다. 디지털 시대에 새로운 지식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대학에서의 연구가 어떤 식으로 바뀌게 될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는 것이다.

KAIST 주최로 15일 서울에서 열리는 ‘2013 세계연구중심대학 총장회의’에 참석하기에 앞서 패트릭 애비셔 로잔공대 총장은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디지털 기술과 빅 데이터의 발전으로 인류는 엄청난 속도와 규모로 지식을 생산하고 공유할 수 있게 됐다”며 “공개 온라인 연구(MOOR·Massive Open Online Research)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연구 수행 방법도 이를 가속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HBP에는 로잔공대를 포함해 전 세계 134개 연구기관이 참여한다. 독일 하이델베르크대, 미국 하버드대, 이스라엘 히브리대, 일본 오키나와 과학기술대학원대, 중국 원저우 의대,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 IBM, SAP 등 국가와 대학, 기업을 총망라한다.

애비셔 총장은 “한 개의 연구실에서 이뤄지던 연구가 이제는 세계 각국의 연구자들이 인터넷을 통해 모여 대규모로 진행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며 “전 세계에서 모이는 방대한 양의 실험 데이터 덕분에 이전에는 감히 시도해보지 못했던 연구 주제들에도 돌파구가 마련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변화는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에서뿐 아니라 인터넷의 조그만 사이트들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수백년 동안의 수학 난제인 ‘쌍둥이 소수 추측’ 문제를 전 세계 수학자들이 모여 풀고 있는 ‘폴리매스’ 블로그가 대표적이다. 쌍둥이 소수 추측은 3과 5처럼 간격이 2인 소수의 짝은 무한하다는 수학 명제로, 지난 6월 장이탕이란 수학자에 의해 간격이 7000만인 소수의 짝은 무한하다는 것까지 증명됐다. 하지만 이 블로그는 단 두 달 만에 이 간격을 5414까지 줄여버렸다.

애비셔 총장은 “전 세계 연구자들이 인터넷에 모여 공동 연구를 진행하는 공개 온라인 연구가 앞으로 대학의 연구 방식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흐름에 대비하지 못한 대학은 사라져 버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학생들은 컴퓨터만 있으면 어디서든 세계 명문 대학의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되고, 의미있는 연구 성과는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협력과 공동 연구를 통해서만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번의 바이오 벤처기업을 창업한 경험이 있는 애비셔 총장은 “대학 교수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창업에 나서야 한다”고도 했다. 그는 “많은 대학의 연구가 공공의 지원을 받고 있는 만큼 교수들은 그들의 발견이나 기술을 사회로 전파할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창조경제에 대해선 “필요성과 비전에 공감한다”며 “창조경제는 잘 교육받은 국민과 세계 정상급 연구대학, 기업가 정신이 필요한데 한국은 이를 모두 갖추고 있다”고 평가했다.

◆로잔공대=취리히연방공대와 더불어 스위스를 떠받치는 두 기둥으로 불린다. 취리히공대가 기초과학 위주라면 로잔공대는 응용과학·공학 중심이다. 응용과학을 다루면서도 지금까지 8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창업자에게 1년간 연구비를 보장하는 등 산업화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노바티스, 시스코, 노키아, P&G 등 글로벌 기업이 학내에 연구개발(R&D)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패트릭 애비셔 총장은 제네바대와 프리부르대에서 각각 1980년 의학박사와 1983년 신경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 총장에 부임했으며 뇌과학 분야 연구자로 3개의 바이오 관련 기업을 직접 창업하기도 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