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디네자드와 논쟁 끝에 핵협상 대표서 물러나
이슬람혁명 참여…라프산자니·하메네이와 친분

이란 제11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승한 하산 로우하니 당선인에게는 '외교의 달인'(Diplomat Sheikh)라는 별명이 있다.

최고국방위원회 위원, 대통령 국가안보자문, 최고국가안보위원회 사무총장, 핵협상 수석대표 등은 1979년 이슬람혁명 이후 그가 역임한 자리들이다.

외교안보 분야의 화려한 경력뿐만 아니라 핵협상 수석대표로서 그가 보여준 능력은 아직도 많은 이란인의 기억에 남아 있다.

사데크 지바칼람 테헤란대 정치학 교수는 15일(현지시간) 아랍권 위성방송 알자지라 대담에 출연해 "로우하니가 핵협상 수석대표이던 시절 이란은 핵개발을 진행하면서도 서방 제재를 피해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2005년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취임 이후 대통령과 수차례의 거친 논쟁 끝에 로우하니가 핵협상 수석대표 자리에서 물러난 일화는 유명하다.

서방에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아마디네자드의 강경 기조와 양보할 것은 양보하면서 제재를 피해 핵개발을 지속하겠다는 그의 유화 노선이 충돌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로우하니는 국제 문제에 강경 일변도인 아마디네자드에 저항한 중도파 인사로서 입지를 굳혔다.

2002년 반체제단체의 폭로로 이란 핵개발이 세계의 주목을 받자 그 이듬해 초대 핵협상 수석대표를 맡은 로우하니는 2004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를 피하려고 우라늄 농축을 한시적으로 중단하기도 했다.

최종 대선후보 6명 가운데 유일한 성직자인 그는 1948년 셈난 주 소르케에서 태어났다.

10대 시절 종교 공부를 시작해 곰 신학원과 셈난 신학원에서 수학했고, 팔레비 왕조의 '샤'(국왕)에 반대하는 '반(反) 샤' 인물로 성장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반샤 연설을 하는 그는 '이슬람 혁명의 아버지'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주목을 받기도 했다
1972년 법학 전공으로 테헤란 대학을 졸업했으며 훗날 영국 글래스고 칼레도니언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졸업 이후 샤 왕조에 대한 로우하니의 비판 목소리는 갈수록 커졌다.

그러던 중 체포를 피해 프랑스로 도피한 그는 파리에서 망명 중이던 호메이니와 합류, 훗날 혁명 주도 세력의 일원이 된다.

현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와 중도파 거물 아크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와의 인연은 여기서 시작된다.

라프산자니가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기간 내내 대통령 국가안보자문으로 활동했고, 개혁파 모함마드 하타미 전 대통령 시절에도 6년간 이 자리를 지켰다.

로우하니는 또 최고국가안보위원회에서 하메네이의 대리인을 역임했을 정도로 최고지도자가 신임하는 인물로 보수 성직자, 군부와도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국정조정위원회와 국가지도자운영회의의 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국정조정위원회 산하 전략연구센터 소장도 맡고 있다.

(두바이연합뉴스) 유현민 특파원 hyunmin623@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