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에 호텔로 옮겨 마지막 준비한 듯
유족 측 "장례비 내겠다"…조화 대신 기부 당부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타계 이튿날인 9일(현지시간) 영국 여왕이 거주하는 런던 버킹엄궁에는 조기가 게양됐다.

20세기 영국 정치사에 큰 획을 그은 영국 최초 여성 총리에 대한 왕실 차원의 예우였다.

총리실을 비롯한 주요 관공서에도 이틀째 조기가 걸렸다.

새벽부터 유족 및 정부와 고인의 장례방안을 협의한 왕실은 장례식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부부가 참석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역대 총리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서는 이례적인 결정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차원에서 처칠 총리 이후에는 총리를 비롯한 정치인의 장례식에는 조문하지 않는 원칙을 지켜왔다.

이에 앞서 대처 전 총리가 마지막 4개월을 보낸 런던 시내 리츠 호텔에서는 고인의 시신을 실은 차량이 한밤중에 빠져나와 인근 병원 안치실로 이동했다.

대처 전 총리는 작년 말 치료받던 병원을 나와 평소 애용했던 이 호텔 특실로 옮겨 마지막을 맞을 준비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언론담당 비서를 지낸 버나드 잉엄은 "은퇴 생활은 대처 총리에게는 맞지 않았다.

총리는 은퇴 후 관심을 둘 만한 취미조차 없었다"고 회고했다.

런던 벨그라비아 체스터스퀘어의 대처 전 총리의 자택 앞에는 전날부터 몰린 조문객들이 두고 간 조화와 선물들이 가랑비를 맞으며 고인을 애도했다.

유족 측은 조화가 너무 쌓이자 조문객들에게 꽃을 보내는 대신 대처 전 총리가 중풍과 치매 치료를 받았던 왕립 첼시 병원에 기부를 해 달라고 당부했다.

현장을 찾은 시민 아만사 시니 씨는 "정치적 평가를 떠나 여성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과 편견을 딛고 한 시대를 이끌었던 고인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나왔다"며 애도했다.

부활절 연휴 이후 휴가를 즐기던 웨스트민스터 의사당도 분주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대처 전 총리 사망을 추모하는 긴급 하원 회의가 10일 소집된 영향이었다.

총리실에서 17일로 장례일정이 발표되자 프란시스 모드 국무조정실장은 "이번 장례식은 세계 각국의 주요 인사가 조문객으로 방문하는 대규모 행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온종일 고인에 대한 애도 물결이 이어진 가운데 정치적 유산을 둘러싼 논란도 이어졌다.

노동당 존 만 의원은 대처리즘을 비판하며 하원 추모 회의에 동의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그는 "대처 전 총리를 위해 예산을 허비하는 회의에 참석하느니 치과 진료를 받겠다"고 밝혔다.

대처 시대의 마감을 조롱하는 규탄 시위가 영국 곳곳에서 벌어져 고인에 대한 평가도 엇갈렸다.

런던 도심 이스턴 지역에서는 대처 전 총리의 사망 소식에 전날 밤부터 시위대 200여 명이 몰려나와 거리축제를 연출하며 출동한 경찰과 대치했다.

1981년 폭력시위로 몸살을 앓았던 런던 남부 브릭스턴에서는 시위대 100여명이 거리를 행진하며 대처 시대를 마감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들은 인근 극장 외벽에 올라 현수막과 영화 홍보 간판을 이용해 대처 전 총리의 사망을 조롱했다.

거리 외벽 곳곳에는 대처 전 총리가 우유와 국민의 희망까지 날치기했다는 거리그림도 그려졌다.

프리미어리그를 포함한 영국 프로축구리그 연맹은 대처 전 총리의 업적을 둘러싼 논란에 경기 전 묵념 행사를 하려던 계획을 취소했다고 발표했다.

대처 전 총리의 사망을 조롱하는 시위가 과열 조짐을 보이자 각계의 호소도 이어졌다.

아일랜드공화국군(IRA) 사령관을 지낸 신페인당 소속의 마틴 맥기니스 북아일랜드 제1 부장관은 "대처 전 총리는 평화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죽음을 조롱하는 것은 정신을 망가뜨리는 일"이라며 자제를 당부했다.

노동당 소속 토니 블레어 전 총리도 "대처 전 총리를 모독하는 길거리 파티는 고약한 행동"이라며 "정치적 신념은 다르더라도 존경심은 보여야 한다"고 안타까움을 밝혔다.

총리실은 국가 예산으로 치르는 장례식에 대한 비판을 고려해 유족 측이 차량비와 화장비 등 주요 비용을 자체 부담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고 공개했다.

대처 전 총리의 장례는 2002년 여왕 모친의 장례식을 지휘했던 말콤 로스 경이 진행을 맡아 고인이 좋아했던 영국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의 음악을 사용해 거행될 것으로 알려졌다.

(런던연합뉴스) 김태한 특파원 th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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