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장기불황에서 배운다 (2부) - 박근혜 정부의 과제 (4) 환율은 지켜라

'엔低 공세' 일본…한국에 희생 강요
글로벌 공조 통해 선진국 양적완화 견제해야
주식 양도차익 과세, 투기자금 유입 억제 효과
삼성전자 등 글로벌 기업, 원화결제 추진도 방법
[한경 특별기획] 외환투기 규제로 원화절상 막아라

[한경 특별기획] 외환투기 규제로 원화절상 막아라

1985년 미국 뉴욕의 플라자호텔. 미국 협상 대표는 일본 대표에게 ‘125’라는 숫자가 적힌 메모를 제시했다. 달러당 250엔대이던 엔화 환율을 125엔으로 낮추라(엔화 절상)는 최후통첩이었다. 이 요구는 ‘플라자 합의’라는 말로 포장됐다. 당시 세계를 쥐락펴락한 5개국 재무장관들이 동원됐다.

미국에 대한 수출로 먹고 살던 일본은 미국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엔화 가치 상승을 상쇄하기 위해 곧바로 기준금리를 내렸다.저금리로 고삐 풀린 돈은 산업 전선뿐 아니라 주식과 부동산으로 흘러들었다. 그때부터 1990년까지 일본 땅값은 평균 50% 올랐다. 도쿄와 나고야의 부동산은 최대 900%까지 급등했다. 이 거품은 1990년대 초 순식간에 꺼졌다. 부동산에 투자했던 개인과 기업은 파산했다. 은행들도 돈줄을 죄면서 경제는 활력을 잃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의 시작이었다.

통화전쟁은 다시 반복되고 있다. 28년 전 미국이 일본과 독일을 겨냥했던 것과 달리 지금은 ‘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총리의 엔저 정책)를 내세운 일본이 미국의 지원 아래 한국과 중국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형국이다. 어느 때보다 한국 정부의 환율 정책이 중요한 이유다.

◆‘엔저’로 중소기업은 벼랑 끝

일본은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미국 수출로 살길을 찾았다. 효율적 생산 방식을 도입해 혁신 제품을 만들어 1970년대부터 미국 소비재 시장을 장악했다. 일본 기업들은 대미 무역 흑자 덕분에 승승장구했다. 1980년대 중·후반까지 시가총액 기준 세계 10대 기업 중 9개가 일본 기업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양상은 달라졌다. 미국이 경상적자를 줄이기 위해 달러 가치를 낮춰 엔화는 달러화에 대해 2년간 65% 절상됐다. 일본 기업들은 수출 경쟁력을 잃어갔다. 2000년 세계 10대 기업 리스트에서는 일본 기업이 모두 빠졌다.

한국도 일본과 같은 길을 걷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벌써 전조는 나타나고 있다. 일본과 경쟁관계에 있는 자동차업종이 대표적이다. 엔화 가치가 떨어지고 원화 가치는 올라가면서 현대·기아자동차가 직격탄을 맞고 있다. 현대자동차의 작년 4분기(10~12월) 영업이익은 1조8319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1.7% 감소했다. 시장 예상치를 밑도는 수준이다.

[한경 특별기획] 외환투기 규제로 원화절상 막아라

앞으로 글로벌 환율전쟁은 더욱 심해질 가능성이 높다. 올해 미국과 일본, 중국 등에서 새 정부가 동시에 출범했다. 각국 정부의 모토는 같다. 자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 확장적 통화 정책으로 통화가치를 떨어뜨리고, 수출을 늘리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주요국 신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이란 보고서에서 “올해 선진국들이 신흥국에는 통화가치 절상을 요구하면서 자국 투자자와 지식재산권을 보호해 달라고 압박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연구소는 이럴 때 한국 정부는 글로벌 갈등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가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어떤 비난도 감수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배민근 LG경제연구원 연구원은 “유럽과 미국이 강도 높은 양적완화 정책으로 자국 통화가치를 끌어내리고 있는데, 우리도 무방비 상태로 있지 말고 적극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시장 친화적 방식으로 환율 관리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김주현 현대경제연구원장은 “외환시장에 직접 개입하는 것보다 외환당국이 구두 개입을 하거나 단기 외화자금의 유출입을 규제하면 환율 급등락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나아가 국제 공조를 통해 선진국의 양적완화를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외환 투기 막을 장벽 필요

[한경 특별기획] 외환투기 규제로 원화절상 막아라

유럽연합(EU) 재무장관들은 최근 독일과 프랑스 등 11개국이 합의한 금융거래세 도입을 승인했다. ‘토빈세’로 불리는 금융거래세는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 속에 금융시장의 혼란을 부추기는 투기적 금융거래를 막는 게 목적이다. 유럽이 토빈세 카드를 들고 나온 만큼 한국 정부도 ‘한국형 토빈세’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20일 “환율 안정이 굉장히 중요한 것을 잘 알고 있다”며 “기업이 손해를 보지 않도록 선제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말해 환율 방어를 위한 토빈세 도입이 탄력을 받을 것이란 전망이다. 그러나 대통령 취임을 앞둔 당선인이 직접 환율 안정과 선제 대응을 거론한 것은 자칫 정부가 환율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의지로 읽힐 수 있어 적절치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

전문가들은 외환 투기세력을 견제하려면 오히려 주식 양도차익 과세 등 자본이득에 세금을 매기는 게 더 현실적이란 지적도 한다. 토빈세는 외국인 투자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미국 등의 반발을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주식 양도차익 과세는 내·외국인 차별 없이 적용해 환투기 자금 유입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는 게 장점이다.

◆‘통화 한류’를 일으켜라

국내 기업이 환율 변동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근본적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원화를 국제 통화로 발전시키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는 얘기다. 우선 삼성전자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원화 결제를 추진해 원화의 국제화를 부분적으로 실험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은 “중국과의 교역에서는 원화와 위안화를 서로 교차해 결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해외 투자를 늘려야 할 필요성도 대두하고 있다. 연·기금과 일반 펀드가 해외에 적극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원화 절상 압력을 완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부문장은 “해외 증권 투자가 늘더라도 환헤지를 하면 원화 절상을 막는 효과가 사라진다”며 “펀드 수익률과 환헤지 간 관련성이 높지 않다는 연구가 있는 만큼 과도한 환헤지를 하는 관행의 개선도 함께 유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인설 기자 surisur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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