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장기불황에서 배운다 (1부) 잃어버린 20년의 징후 - (2) 부동산 침체 늪

일본은 '반면교사', 저금리·부동산 不敗 신화…건설·금융사 부도 닮은꼴
연착륙 더 절실한 한국, 기업 아닌 개인 중심 투자…경제 충격 日보다 클수도
[2013 신년기획] 日 집값, 4천만  8천만  2천만엔…환호가 비명으로

일본 도쿄에서 서쪽으로 40㎞가량 떨어진 다마(多摩)신도시. 이곳에서 20년째 살고 있는 이나나가 이사오(稻永勇夫·60)는 자신을 ‘달팽이’라고 불렀다. 집을 짊어지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라는 자조(自嘲)였다. 다마신도시에 이사를 온 것은 1986년. 20평대 아파트를 4000만엔(약 4억8000만원) 정도 주고 샀다. 3년이 지나자 옆 동네 비슷한 평수의 아파트가 8000만엔 이상에 분양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행복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1991년이 되자 집값이 순식간에 고꾸라졌다. 손쓸 틈이 없었다. 지금은 2000만엔 밑으로 집을 내놔도 보러 오는 사람조차 없다.

서울 도곡동에 살던 김선갑 씨(61)는 2006년 경기 용인시 수지로 이사했다. 134㎡(40평)짜리 아파트를 7억원에 샀다. 아이들도 다 커서 굳이 강남에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몇 년 살다가 웃돈 얹어서 판 뒤 고향으로 내려가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꿈은 악몽이 됐다. 아파트값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금은 5억원대로 주저앉았다. 아파트를 살 때 은행에서 빌린 돈은 3억원. 연 5% 고정금리로 매달 130만원 가까이를 이자로 낸다. 신문에 ‘하우스 푸어’라는 말만 나오면 담배를 찾는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부동산이 출발점이다. 부동산으로 천국을 맛봤고, 그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졌다. 거품이 거품인 줄 당시엔 몰랐다. 무서운 건 20년 전 일본의 상황이 지금의 한국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부동산 대폭락’이라는 책을 쓴 일본의 경제평론가 다치키 마코토(立木信)의 말은 정곡을 찌른다. “지금 한국의 부동산시장은 정확히 일본 그 자체다.”

◆저금리와 ‘부동산 불패’ 신화

무엇보다 저금리가 부동산 거품을 일으켰다는 게 일본과 한국의 비슷한 점이다. 일본 경제에는 1985년 9월 ‘플라자 합의’라는 초강력 태풍이 불어닥쳤다. 미국 등 선진 5개국이 무역역조를 시정하기 위해 일제히 엔화 가치를 높이겠다고 소매를 걷어붙인 것이다. 엔화 가치는 1년 새 달러당 250엔대에서 120엔대까지 치솟았다. 수출전선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내수에서 답을 찾으려고 했다. 이를 위해 시중에 돈을 풀었다. 1986년 연 5%였던 기준금리를 1년 뒤 연 2.5%까지 떨어뜨렸다. 폭발한 유동성은 부동산으로 집중됐다. 1987년 한 해에만 도쿄의 평균 땅값은 68.8% 올랐다. ‘도쿄를 팔면 미국 전체를 살 수 있다’는 우스개가 유행어처럼 번져나갔다.

한국도 비슷하다. 1997년 외환위기, 2000년 정보기술(IT) 거품 붕괴, 2003년 신용카드 대란 등을 거치며 저금리가 대세로 자리잡았다. 이는 집값을 띄우는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부동산 불패 신화’도 양국의 공통분모다. 일본 재무부 출신인 니시무라 요시마사(西村吉正) 와세다대 명예교수는 “거품경제 당시 일본 국민은 그게 거품인 줄 몰랐다”며 “공무원은 물론 언론인과 정치가도 모두 부동산은 오르기만 하는 줄 알았다”고 회고했다. 은행 등 금융권도 ‘불패 신화’에 기대어 손쉬운 장사에 몰두했다. 1980년대 후반엔 부동산 담보인정비율이 120%에 달하기도 했다. “일정 비율 이상의 사람이 달리기 시작할 때 그 가운데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려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했던 행동경제학자 로버트 실러의 말처럼 모두가 뭔가에 홀린 듯 부동산으로 질주했다.

◆어른거리는 일본의 그림자

20년 전 일본에서 나타났던 부동산 붕괴의 징후는 한국에서도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일본은 1991년을 기점으로 금융권의 타격이 본격화했다. 약한 고리부터 끊어졌다. 부동산업에 집중적으로 대출한 주택금융회사 7곳이 모두 파산했다. 저축은행 등 제2금융권에서도 문을 닫는 곳이 속출했다. 한국의 저축은행들이 잇달아 간판을 내리고 있는 요즘 상황과 그대로 겹친다. 건설회사들의 도산 행렬도 ‘과거의 일본’과 ‘현재의 한국’이 판박이다.

거품 붕괴가 시작된 시점의 사회·경제 환경에도 공통점이 적지 않다. 저성장 시대의 도래가 대표적이다. 1988년 7.1%에 달했던 일본의 경제성장률은 1991년 3.3%로 하락한 뒤 그 다음해부터 쭉 1% 안팎의 낮은 성장률을 지속 중이다. 지난해 성장률이 2%대로 주저앉은 한국의 형편과 비슷하다. 인구 구조의 변화도 똑같다. 저출산·고령화 현상이 본격화하면서 그 당시 일본과 지금의 한국 모두 주택 수요가 줄어드는 추세다.

물론 한국에 부동산발(發) 장기 침체가 올 것인가에 대해선 의견이 갈린다. 최희갑 아주대 경제학과 교수는 “20년 전 일본과 지금의 한국 부동산 상황은 서로 다른 점이 적지 않다”며 “한국 경제가 장기 불황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다”고 진단했다. 최 교수가 주목한 부분은 투기의 대상이다. 일본은 기업을 중심으로 ‘토지’에 집중했다. 반면 한국은 아파트 등 주택이 문제다. 이로 인해 거품의 크기가 다르다는 주장이다. 일본 6대 도시의 평균 땅값은 1986~1990년 3.07배 상승했다. 이에 비해 한국은 2002년 이후 지금까지 전국주택지수가 1.5배 정도 오르는 데 그쳤다.

그러나 오히려 한국이 더 위험한 상황이라는 반론도 만만찮다. 한국은 기업이 아닌 개인 중심의 부동산 투자였기 때문에 거품이 터질 경우 오히려 일본에 비해 소비 침체의 강도가 더 세고 내수 침체 기간도 더 길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박덕배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화살은 이미 오래전 시위를 떠나 과녁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며 “이것이 경착륙과 연착륙 중 어디에 도달할지만 남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도쿄=안재석 특파원 yag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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