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장기불황에서 배운다 (1) 잃어버린 20년의 징후 - 저성장의 덫

셔터토오리, 200여개 상점중 5~6곳만 간신히 영업
용산전자상가, 3년전부터 불황한파…빈가게 늘어
[2013 신년기획] 문 닫은 상점 즐비한 日 셔터토오리…닮아가는 용산상가

도쿄 북동부 가쓰시카(葛飾)구 가메아리. 단행본으로만 1억5000만부가 팔린 ‘여기는 가메아리공원 앞 파출소’라는 일본 만화의 배경이 된 곳이다. ‘원피스’ ‘드래곤볼’에 이어 일본 역대 단행본 판매량 3위를 기록한 인기 만화의 무대인 이곳에도 장기침체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가메아리 지하철역에서 500m 정도 떨어진 아무르 동화상점가. 지난 4일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오후 5시께 찾은 이곳은 ‘유령도시’ 같았다. 대부분의 상점은 문을 닫았고, 멀리 자동판매기 불빛만 선명했다. 성인 남자라도 선뜻 들어서기에 머뭇거려지는 분위기였다. 용기를 내 들어선 거리엔 셔터를 내린 가게만 즐비했다.

200여곳의 가게 중 영업을 하는 곳은 노인이 운영하는 구멍가게와 오래된 이발소 등 대여섯 곳 정도였다. 일본에선 이처럼 폐허가 된 상가가 늘어나면서 ‘셔터토오리(셔터거리·通り)’란 신조어까지 생겼다.

서울 용산구에 있는 용산전자상가의 최근 모습은 일본의 ‘셔터토오리’를 연상시킨다. 전자제품 판매 밀집지역인 용산전자상가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전까지만 해도 연 매출이 5조원을 넘을 정도로 주말이면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러나 지난 연말 찾은 상가 분위기는 사나운 날씨만큼 썰렁했다. 용산전자상가 주요 5개 상가 중 하나인 선인상가 3층엔 상점 네 곳 중 한 곳의 셔터가 내려져 있다.

선인상가 상우회 관계자는 “3년 전만 해도 자리가 없어 자투리 공간이라도 상점을 만들었는데, 불황 여파로 빈 가게가 늘고 있다”며 “선인상가 내 800여개 업체 중 이미 100여개 업체가 떠났다”고 말했다.

한국 경제에 장기 불황의 공포가 밀려오고 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자다. 일본 경제는 1991~2011년 20년간 연평균 0.9% 성장에 그쳤다. 자산 거품이 붕괴된 1993년을 포함해 5개년은 마이너스 성장했다. 한국 국내총생산(GDP) 증가율도 글로벌 경기침체 여파로 2011년 2분기(4~6월) 이후 6분기 연속 0%대에 머물렀다. 한국 경제가 일본을 따라가는 건 아닌지 걱정하게 하는 이유다.

[2013 신년기획] 문 닫은 상점 즐비한 日 셔터토오리…닮아가는 용산상가


○추락하는 잠재성장률

일본 경제가 20여년째 제자리걸음하고 있는 건 1990년 이후 잠재성장률이 급격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잠재성장률은 물가상승에 대한 걱정 없이 인력 자본 등 생산요소를 활용해 달성할 수 있는 최적의 성장률이다. 일본은 1990년대 접어들면서 인력과 투자부문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생산가능인구는 1997년부터 감소세로 돌아섰다. 기업들은 빚 갚는 데 주력해 투자를 미뤘다. 그 결과 1980년대 3%를 웃돌던 잠재성장률은 1990년대 초반 2% 수준으로 떨어지더니, 2000년대 들어 0%대로 급락했다.

1990년대 실제 성장률이 1.5%에 그치면서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됐다. 성장률이 잠재성장률에 크게 못 미치면서 경제주체들의 심리가 꽁꽁 얼어붙었다. 기업은 투자를 축소했고, 가계는 소비를 줄였다. 이는 또다시 성장세 둔화와 잠재성장률 하락으로 이어졌다.

한국의 잠재성장률도 큰 폭으로 떨어지고 있다. 한국은행과 국회예산처에 따르면 잠재성장률은 1990년대 6.1%에서 2001~2004년엔 4.8%로 낮아졌다. 이후에도 꾸준히 하락해 현재 3.7%로 주저앉았다. 한국 경제도 잠재성장률에 크게 못 미치는 부진이 2011년 이후 2년째 이어지고 있다. 최근 분위기는 더욱 심상찮다. 지난해 3분기 GDP 증가율은 전기 대비 0.1%로, 3년6개월 만에 최저를 기록했다. 설비투자는 2분기 연속 감소했다. 이우광 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 자문위원은 “국내 여건을 볼 때 한국도 장기불황의 초입에 들어섰다”며 “잠재성장률을 3% 후반에서 유지할 수 있을지 따져보면 상당히 절망적”이라고 말했다.

○소비 부진 장기화 우려

소비 부진도 심각한 문제다. 내수침체에 직격탄을 날리기 때문이다. 일본은 장기침체 과정에서 급격한 소비 위축이 두드러졌다. 일본의 평균 민간소비 증가율은 1980년대 3.7%에서 1990년대 1.5%로 급락했다. 2000년 들어서도 0.9%로 소비 둔화가 심화되고 있다. 장기간 경기침체로 호주머니 사정이 빠듯해진 탓도 있지만, 불확실한 미래로 지갑을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한국도 사정은 비슷하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민간소비 증가율이 2.5%에 그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외환위기를 겪은 1998년(-7.1%) 이후 두 번째로 낮은 수준이다.

강중구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일본이 장기침체 때 겪었던 자산가치 하락과 높은 가계부채 부담, 급속한 고령화 등이 한국에도 나타나고 있다”며 “장기적으로 소비가 늘어나기 어려운 구조”라고 말했다. 소비증가가 성장률을 밑도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내수 부진이 길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서정환 기자/도쿄=안재석 특파원 ceose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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