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 가치의 하락(달러 대비 엔화 환율 상승)세에 탄력이 붙었다. 계기는 일본 자유민주당의 총선거(중의원 선거) 압승이다. ‘무제한 금융완화’를 골자로 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자민당 총재의 경제정책 ‘아베노믹스’가 시장을 휩쓰는 분위기다. 시장에서는 당분간 엔화 약세가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유탄은 한국 수출기업으로 튀었다. 엔화 약세가 가속화할 경우 수출 가격 경쟁력에 차질이 빚어지기 때문이다. 자동차 등 일본과 수출 주력업종의 상당 부분이 겹친다는 것도 부담이다.

○“돈 풀어 엔고(高) 잡는다”

아베 총재는 선거기간 내내 경제정책을 맨 앞줄에 내세웠다. 극심한 경기침체에 시달리는 민심을 잡겠다는 의도였다. 내건 공약도 화끈했다. 금융완화 정책에 ‘무제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지난달 가두연설에서는 “일본은행의 윤전기를 쌩쌩 돌려서라도 돈을 찍어내겠다”고까지 선언했다. 일본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디플레이션과 엔고라는 두 가지 악재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금융완화 정책이 필수라는 판단에서다. 내수경기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대규모 국채를 발행하고 이를 일본은행이 인수토록 하겠다는 계획도 제시했다.

화끈한 ‘아베노믹스’가 선을 보이자마자 금융시장은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엔화 가치는 최근 한 달 새 5% 이상 떨어졌고, 닛케이지수는 1000포인트 이상 상승했다. 다카시마 오사무(高島修) 씨티은행 애널리스트는 “해외 투자자들 사이에서 일단 엔화를 팔고 보자는 분위기가 강해졌다”며 “앞으로 3개월 사이에 엔화 가치가 달러당 87엔대까지 떨어질 가능성(환율 상승)도 적지 않다”고 전망했다.

이제 남은 건 정책의 실행 여부다. 아베 총재가 오는 26일 차기 총리 자리에 오르고 난 뒤에도 공약대로 경제정책을 끌고 나갈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국채발행 등을 통해 경기를 살리기엔 일본의 재무상태가 매우 취약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시험무대는 19~20일 열리는 일본은행의 금융정책회의다. 아베 총재의 압박은 이미 시작됐다. 그는 17일 기자회견에서 “일본은행의 정책입안자들이 이번 선거 결과를 잘 이해하고 적절한 결정을 내리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시장 전문가들은 일본은행이 국채매입기금 규모를 10조엔가량 증액하는 방식으로 아베노믹스에 화답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엔 약세-원 강세 지속되나

최근 3개월간 엔화 대비 원화가격은 20% 가까이 상승했다. 올초엔 한때 100엔당 원화가치가 1500원 선을 넘기도 했지만 지금은 1200원대로 떨어졌다. 일본 경제단체인 게이단렌 등은 환영일색이다. 지긋지긋하던 엔고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됐다는 환호성이다.

반면 한국 기업들에는 긴장감이 감돈다. 원화 가치 상승으로 가격경쟁력이 떨어지면 가뜩이나 글로벌 침체에 빠져 있는 수출시장에서 고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산업연구원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원·엔 환율이 5% 하락(원화가치 상승)하면 연간 수출이 최대 3% 감소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본과의 경쟁이 심한 자동차 철강 기계 조선 등의 업종에 타격이 클 것으로 예상됐다.

엔화 약세의 파장이 원화에 유독 강하게 미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최근 “미국과 일본의 양적완화 경쟁으로 풍부해진 외화가 한국에 밀려들면서 원화 강세 흐름이 계속 이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도쿄=안재석 특파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