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학자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분열돼 있거나 (서로에게) 냉소적이지 않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재선이 확정된 지난 7일 새벽(현지시간) 당선 연설에서 이같이 말했다. 미트 롬니 공화당 후보와의 치열한 대선 캠페인 과정에서 서로에게 남긴 상처를 하루 빨리 잊고 초당적으로 협력해 나가자는 뜻이었다.

시카고에 마련된 오바마 캠프 본부에 모인 군중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지만 불과 7시간 후 열린 뉴욕 증시의 투자자들은 감동보다 주식 투매를 택했다. 공화당이 하원을 다시 장악하면서 2년 동안 시장을 괴롭혀온 정치적 교착상태가 그대로 재현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2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재정벼랑(fiscal cliff)’ 문제에 투자자들의 이목이 집중되면서 이날 다우지수는 장중 한때 369포인트나 빠지는 폭락 장세를 보였다.

◆“승리를 만끽할 시간이 없다”

7일 아침 모건스탠리, 크레디트스위스, 씨티그룹 등 월스트리트 은행들이 고객에게 보낸 ‘대선 결과 분석 및 향후 전망’ 보고서들은 하나같이 “오바마 대통령이 승리를 즐길 시간이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내년 1월1일 현실화될 수 있는 재정벼랑을 피하려면 다음달 현 의회 임기가 끝나기 전에 협상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민주당이 백악관과 상원을, 공화당이 하원을 각각 장악한 정치 지형도가 대선 이후에도 조금도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타협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 보고서의 요지였다.

이날 개장과 함께 급락세로 출발한 증시를 지켜보던 모건스탠리의 한 트레이더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장면인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해 여름 백악관과 공화당의 부채한도(국가가 빌릴 수 있는 부채의 법적 한도) 증액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주가가 하루에 2% 넘게 추락하던 모습을 연상시킨다는 것.

이날 다우지수와 S&P500지수는 모두 2.4%씩 하락했다. 나스닥지수는 2.5% 빠졌다. 국제신용평가사 피치와 무디스가 “정치권이 재정벼랑을 피하지 못하거나 (장기적인) 재정적자 감축안을 내놓지 못하면 내년에 미국의 신용등급을 강등할 수 있다”고 경고해 투매 심리가 확산됐다. 작년 8월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의 미국 신용등급 강등으로 주가가 폭락했던 장면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비엔코리서치의 제임스 비엔코는 “재정벼랑 이슈는 그동안 주가에 반영되지 않았다”며 “대선 결과를 지켜본 투자자들이 ‘협상의 여지가 크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시장 전문가들은 일단 정치권이 재정벼랑을 6개월에서 1년간 연기하는 타협안으로 급한 불을 끈 뒤 논란이 되는 장기 재정적자 감축방안은 차차 논의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모건스탠리는 보고서에서 “그렇다 하더라도 타협은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이뤄질 것이므로 변동성 장세는 몇 달간 불가피하다”고 분석했다.

◆존 베이너 하원 의장 다시 무대 중앙에

이날 워싱턴에는 공화당의 존 베이너 하원의장, 민주당의 해리 리드 상원 원내대표 등 대선 과정에서 잠시 잊혀졌던 얼굴들이 다시 무대 중앙으로 돌아왔다. 지난해 부채한도 증액 협상과 이후 벌어진 재정적자 감축 협상을 주도했던 인물들이다. 대선이 끝나자마자 재정벼랑 문제가 워싱턴 정가의 핵심 이슈로 부상한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베이너 의장과 미치 매코넬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초당적인 협력을 촉구했다. 베이너 의장도 기자회견을 자처해 “공화당 의원들은 오바마 대통령과 타협에 나설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협상의 분위기가 무르익은 것 같아 보이지만 속내는 다르다. 베이너 의장은 “증세를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이는 세제 개혁과 세율 인하를 통한 세원 확대라는 조건이 충족될 때”라고 단서를 달았다. 공화당의 감세 원칙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대선 결과도 협상 분위기에 긍정적이지 않다. 오바마 대통령이 생각보다 큰 차이로 승리를 거머쥐면서 민주당은 협상력이 커졌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롬니 후보도 전국 득표율 49%를 차지했기 때문에 공화당도 쉽게 양보할 수 없는 입장이다. 당 지도부가 어렵게 타협안을 찾아내도, 지난해 당내 강경파가 반대해 협상이 무산된 상황이 되풀이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뉴욕=유창재 특파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