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초 35살의 인터넷 사업가 지미 웨일스는 고민에 빠졌다. 1년 전 문을 연 온라인 백과사전 ‘누피디아’ 때문이었다. 누피디아는 최초의 전자 백과사전이었다. 인터넷에 접속하기만 하면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초기 누피디아는 백과사전계의 혁명처럼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25만달러를 쏟아붓고 1년이 지나도록 성장은 답보 상태였다. 가장 큰 문제는 콘텐츠를 채우는 것이었다.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전문가 팀은 훌륭했지만 작업은 너무 더뎠다. 1년간 누피디아에 올라온 글이 20개에 불과했다.

그해 1월2일 누피디아의 수석 편집장인 래리 생어가 아이디어를 내놨다. “누구나 웹사이트 내의 글을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위키위키웹’이라는 사이트가 있습니다. 누피디아에 이런 방식을 도입하는 건 어떨까요. 많은 사람들이 백과사전을 동시에 편집하면 글을 쓰는 과정은 훨씬 더 빨라질 겁니다.” “하지만 잘못된 내용이 올라오면 어떻게 하죠? 악의적으로 잘못된 정보를 올리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려와 반대가 있었지만 웨일스는 결단을 내렸다. “위키를 만듭시다.” 244년 역사의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을 폐간하게 만든 위키피디아의 시작이었다.

◆백과사전을 좋아한 컴퓨터광

지미 웨일스는 1966년 8월7일 미국 앨라배마주 헌츠빌에서 태어났다. 헌츠빌은 ‘로켓의 도시’로 불린다. 과학자들은 미국 항공우주국(NASA) 마셜 우주비행센터의 본거지인 이곳에서 로켓을 개발하고 있었다. 웨일스가 걸음마를 하던 무렵인 1969년 여름, 우주인 닐 암스트롱은 인류 최초로 달 표면을 걸었다. “어렸을 때 로켓 실험하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우주에 대한 열광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였죠. 이 시기에 헌츠빌에서 자랐다면 기술과 과학, 그리고 미래에 대해 낙천적인 관점을 갖게 됐을 것입니다.”

1968년 웨일스가 세 살이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가정방문 외판원으로부터 백과사전 전집을 샀다. 당시 슈퍼마켓 관리자였던 웨일스의 아버지는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백과사전을 산 것은 환영하지만, 아이가 좀 어리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어머니의 교육법은 통했다. 지미는 네 살 때 읽는 법을 배웠다. “나는 백과사전에 정말로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어요.” 그러나 그 백과사전에는 문제가 있었다. 빠른 속도로 변하는 세상의 일들이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책들은 점점 뒤처져 갔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판사들은 매년 최신 정보 업데이트용 스티커를 보냈다. 지미와 어머니는 이 스티커들을 책에다 붙이면서 새로운 사실들을 배웠다.

1979년 지미는 사립고등학교 랜돌프에 들어갔다. 랜돌프는 학생들에게 컴퓨터를 제공했다. 웨일스는 컴퓨터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학창시절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의 나에 대해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대답은 ‘컴퓨터만 알던 괴짜’일 겁니다.”

◆위키피디아의 성장

2001년 1월15일 위키피디아가 문을 열었다. ‘위키’는 하와이어로 ‘재빠르다’는 뜻의 ‘위키위키(wikiwiki)’에서 유래한 말이다. 1년 뒤인 2002년 1월15일, 2만여개의 글이 올라왔다.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모든 지식에 무료로 접근할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해 보세요.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 인터넷이 안 되고 교육을 받지 못하는 곳에 있는 사람들도 접근할 수 있는 무료 백과사전 말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지식의 힘이 전해지는 것, 우리가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웨일스의 오랜 꿈이 비로소 이뤄졌다.

위키피디아의 성장 속도는 놀라웠다. 누구나 어떤 항목에 대해서도 글을 쓰고 수정할 수 있다는 게 위키피디아가 급성장한 비결이었다. 웨일스는 이 현상을 ‘피라냐 효과’라고 설명했다. 피라냐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어류로 고기를 좋아한다. 한 마리가 먹이를 먹기 시작하면 나머지가 본능적으로 뛰어든다. 이런 방식으로 위키피디아 작가들은 떼를 지어 특정 주제를 완전히 정리할 때까지 공략했다. “누군가 짧고 사소한 글을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글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글을 키우는 겁니다.”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는 선의의 동기가 위키피디아 성장의 원동력이었던 셈이다.

◆비영리재단이 되다

위키피디아는 영어판으로 시작했다. 이후 점차 다른 언어의 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세계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2002년 문제가 발생했다. 수익 없이 운영하는 데 한계가 생겼다. 자금이 떨어져갔다. 직원들에게 줄 월급이 없었다. 월급을 못 받게 된 직원들은 자원봉사로 일했다. 웨일스는 광고를 통해 돈을 벌기로 했다. 하지만 자원봉사자들은 이에 강하게 반발했다. 자신들이 지식을 공유하기 위해 선의로 만든 콘텐츠가 상업화되는 것에 반대했다. 일부 자원봉사자들은 위키디피아를 떠났다.

자원봉사자로 일했던 에드가 엔예디는 위키피디아를 그만두고 위키백과라는 복사본을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다. 엔예디는 위키피디아를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다. “잘 있어라, 돈을 버는 위키페이디아(Wikipaidia, 위키피디아의 가운데 스펠링 ‘ped’를 돈을 지급한다는 뜻의 ‘paid’로 바꿔 돈을 벌려는 위키피디아를 패러디한 말).”

자원봉사자들이 위키백과로 떠나자 위키피디아는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웨일스는 위키피디아를 비영리로 운영하기로 했다. 2003년 6월 웨일스는 비영리기구인 위키피디아 재단을 세웠다. 3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됐던 위키피디아의 기업가치를 포기한 셈이다. 웨일스는 위키피디아를 비영리재단으로 만든 것에 대해 ‘가장 바보 같았지만 동시에 가장 영리했던 일’이라고 고백했다.

◆“실패해봐야 진짜 기업가”

악플러들은 위키피디아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이들은 인터넷의 익명성 뒤에 숨어 논쟁적이고 부적절한 글이나 욕설을 올려 갈등을 부추겼다. 편집전쟁도 문제였다. 다른 사람들이 편집한 것을 계속 자신의 생각대로 되돌리거나 올라온 글을 삭제하는 이도 있었다. 이들은 위키피디아 콘텐츠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고 성장을 방해했다. 위키피디아가 커지자 웨일스는 더 이상 혼자 악플러들을 관리할 수 없었다. 그는 2001년 일부 사용자들에게 관리 권한을 부여했다. 2004년엔 중재위원회를 만들었다. 중재위원회는 문제가 되는 사용자들의 활동을 금지하거나 막았다.

위키피디아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대중적인 백과사전이 됐다. 영어판에는 300만개 이상의 항목이 있다. 독일어 스페인어 중국어는 물론 우르두어(인도 힌두스탄의 언어 중 하나) 체로키어(북아메리카 인디언 언어) 키쿠유어(케냐의 지방 언어)까지 272개 언어판이 있다. 2010년 6월까지 1200만여명이 영어판 위키피디아에 글을 썼다. 자매 프로젝트들도 생겨났다. 무료 온라인 사전 윅셔너리와 위키뉴스, 위키쿼트 등이 그것이다.

웨일스는 어떻게 성공적인 기업가가 됐는지에 대해 늘 이렇게 말한다. “빨리 실패하라. 많이 실패하라. 그리고 그 과정을 즐겨라. 실패해 봐야 진짜 기업가다.”

전설리 기자 slj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