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필름회사의 디지털시대 생존비결 '사업 다각화·구조조정'
“우리나 코닥이나 디지털 시대가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차이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지 알았고 이를 실행했다는 것이다.”

고모리 시게다카(古森重隆·73) 후지필름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WSJ는 “많은 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필름업체인 후지필름이 건재한 것은 경이로운 일”이라고 평가했다. 후지필름의 성공은 지난 수십년간 세계 필름시장을 양분했던 이스트만 코닥의 몰락과 대조된다. 이 차이를 만든 사람이 고모리 CEO다.

○고모리, 죽는 것보다 수술해 사는 것이 낫다

고모리 CEO는 1963년 후지필름에 입사, 2003년 6월 최고경영자가 됐다. 샐러리맨의 꿈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정상의 자리에서 본 회사의 경영은 엉망이었다. 디지털카메라가 시장에서 인기를 끌면서 소비자들은 더 이상 후지필름의 제품을 찾지 않았다. 주력 분야인 필름사업의 매출은 매년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회사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필름부문에 배치돼 있었다. 고모리 CEO는 매일 저녁 임원들과 회사의 미래에 대해 토론했다. 임원들은 다양한 기능을 갖춘 디지털카메라를 개발해야 한다며 이 부문에 대한 투자를 대폭 늘려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고모리 CEO는 침묵했다.

이미 디지털카메라 시장에 소니와 니콘, 캐논, 미놀타 등 쟁쟁한 일본 업체들의 제품이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승산이 높지 않아 보였다. 고모리는 어느 날부터 임원이 아닌 엔지니어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기업의 기본이 되는 엔지니어들에게 미래가 달려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엔지니어들에게 “다양한 기술자원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업영역을 개척해보자”고 제안했다. 디지털시대의 생존비결로 ‘사업 다각화’를 모색한 것이다. 사업 계획은 은밀히 진행됐다. 경쟁사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시장 조사 및 차세대 사업 투자 등에 대한 연구가 1년6개월 넘게 진행됐다. 2005년 고모리는 평판 디스플레이, 의료장비, 제약, 화장품 등에 대한 투자를 결심했다. 이 모든 사업에 카메라 필름 제조기술을 응용하기로 했다. 대신 전통의 필름부문을 중심으로 5000여명의 구조조정도 단행했다.

이듬해인 2006년 10월 고모리는 회사를 지주회사 체제로 개편했다. 원래 사명이었던 ‘후지포토필름’에서 ‘포토(photo)’를 완전히 빼버렸다.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한 것이었다. 사진을 중심으로 한 비즈니스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고모리는 “당시 내부에서 (나에 대해) 미쳤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새로운 분야에 투자하는 것을 모두가 두려워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사업확장의 근간인 필름 관련 기술은 버리지 않았다. 필름 개발과정에서 사용된 20만점의 화학물질을 활용, 제약·화장품사업에 응용한 것이다.

2007년 후지필름이 내놓은 ‘아스타리프트’라는 화장품은 필름의 가장 중요한 재료인 ‘콜라겐’이라는 단백질을 인간의 피부에 적용해보자는 한 직원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사진의 변색을 막는 ‘아스타키산틴’이라는 항산화 성분도 피부 노화를 억제하는 데 효과가 있는 것으로 확인된 것. 여성 고객들 사이에 ‘아스타리프트’는 큰 인기를 끌었다.

그 덕분에 2007년 이 회사의 매출은 2조8468억엔, 영업이익 2073억엔을 기록해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다. 당시 니혼게이자이신문은 “1934년 설립 후 70여년 동안 쌓아온 후지필림의 필름제작 관련 화학기술을 활용해 화장품 사업에서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이와 함께 후지필름은 투명성과 얇은 두께, 균일한 표면을 유지해야 하는 필름 기술을 활용, LCD 패널 소재기업으로 변신하는 데도 성공했다.

고모리는 “필름을 만드는 데 적용하는 나노기술을 화장품과 의료기술 등에 접목시킨 것은 우리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또 “죽는 것보다 차라리 수술해 사는 것이 낫다는 생각으로 변신을 시도했다”고 덧붙였다.

○M&A도 성장의 동력

고모리의 또 다른 승부수는 공격적 인수·합병(M&A)이었다. 발전 가능성이 보이는 업체는 모두 M&A 대상이다. 고모리가 CEO로 취임한 후 지난해까지 후지필름은 국내외 40개사 M&A에 90억달러(10조원)를 썼다. 2008년 일본 제약회사인 도야마화학을 인수했고 세계 2위 제약사인 독일 머크의 자회사 두 곳을 400억엔(5200억원)에 사들였다. 인도의 대형 제약회사인 닥터 레디스(DRL)와 공동으로 의약품 제조를 위한 합작회사를 설립키로 했다. 후지필름과 DRL의 지분율은 각각 51%와 49%다. 후지필름은 현재 2600억엔 수준의 제약 부문 매출을 10년 안에 1조5000억엔(20조원)대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올 들어선 미국의 초음파 진단장비제조업체 소노사이트를 9억9500만달러(1조1280억원)에 사들였다. 분식회계로 논란을 빚고 있는 광학렌즈업체인 올림푸스의 지분 인수도 검토 중이다. 올림푸스가 70%를 장악하고 있는 글로벌 내시경 시장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고모리는 “올림푸스가 지원을 요청한다면 돕고 싶다”며 “구체적 결정은 4월 말 주주총회가 열린 이후에나 나올 것”이라고 설명했다. 2010년 2조3000억엔의 매출을 올린 후지필름은 2018년에 의료분야에서만 1조엔(15조원)의 매출을 올린다는 계획이다. 고모리는 M&A를 통해 의사 결정이 더디고 추진력이 약하다는 일본 기업의 단점을 철저히 털어내는 작업을 진행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구조조정도 마찬가지다. 고모리는 글로벌 경제위기가 터진 2008년 명예퇴직 등 한 번의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시장의 변화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 능동적인 회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일본 기업들의 전통으로 볼 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고모리는 최근 고민에 빠졌다. 엔화 강세와 유럽 재정위기 확산 등으로 모든 분야가 타격 받기 시작한 것. 니혼게이자이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4~9월) 후지필름의 전체 매출 중 55%가 해외에서 이뤄졌다. 그만큼 후지필름이 환율 변동에 민감하다는 뜻이다. 그는 달러당 엔화가치가 85~90엔은 돼야 한다고 보고 있다. 최근 엔·달러 환율은 76엔대를 형성하고 있다.

고모리는 “엔화 가치가 더 올라가면 일본 내 공장을 유지하기가 더 힘들어질 것”이라며 “순익도 지금의 절반으로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후지필름은 해외 생산 공장을 더 많이 짓고 중국 등 신흥시장에서의 헬스케어 사업을 확대한다는 사업 계획을 세웠다. 고모리는 “수출로 성장해온 일본 기업들에 유럽 재정위기, 엔고 등은 넘어야 할 과제”라며 “나를 믿고 있는 직원들을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성장 동력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성호 기자 jas@hankyung.com

◆고모리 시게다카는…

△1939년 일본 규슈 나가사키현 출생 △1963년 도쿄대 경제학과 졸 △1963년 후지필름 입사 △1996년 후지필름 유럽지사장 △2003년~현재 후지필름 최고경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