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 이명박 당시 대통령 당선자에게 축하전화를 건 일본 대표는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총리였다. 그 다음해 이 대통령의 일본 파트너는 아소 다로(麻生太郞) 총리로 바뀌었고,1년 뒤엔 다시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가 바통을 이어 받았다. 그 역시 겨우 9개월을 버티다 실권했고,다음 타자인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도 1년여 만에 물러났다. 이번에 민주당 신임 대표로 선임된 노다 요시히코가 30일 새 총리로 임명되면 이 대통령은 재임 기간 중 다섯 번째 일본 총리를 만나게 된다.

일본 총리의 사임극(劇)이 반복될 때마다 비난의 화살은 대부분 일본 정치 특유의 '파벌 시스템'에 집중돼 왔다. 의원내각제인 일본은 국회(중의원) 다수당의 대표가 총리에 오른다. 문제는 일본 정당 내에 파벌이 너무 많다는 것.'총리 회전율'을 높여 더 많은 정치인이 기회를 잡아야만 당내 불만이 없어지는 구조다. '나눠먹기식 정치'가 만연할 소지가 큰 셈이다.

최근엔 파벌 정치로 총리가 단명하는 바람에 일본 경제마저 멍들고 있다는 우려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무디스가 지난 23일 일본의 신용등급을 강등하면서 꼽은 이유 중 하나도 '단명 총리'였다.

물론 일본이 잘나갈 때도 파벌은 있었고,총리의 수명도 길지 않았다. 제1대 내각을 이끈 이토 히로부미 이후 간 총리는 일본 역대 94번째 내각을 이끈 61번째 총리였다. 126년 동안 100번에 가까운 내각이 새로 만들어졌으니 계산상으로 내각의 평균 존속기간은 2년이 채 되지 않는다. 일본 정치의 DNA에는 '단명 총리'의 유전자가 내재돼 있는 셈이다. 일본은 이런 정치 시스템 속에서도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을 일궈냈다. 그러나 일본 경제 전반이 고령화로 인해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단명 총리'로는 더 이상 버텨내기 어려운 처지에 몰렸다. 단명 총리가 경제에 부담이 되는 건 물론이고,최근엔 부진한 경제가 총리의 수명을 단축하는 '역방향'의 힘도 강해졌다. '파벌 정치' 외에 단명 총리 양산의 원인이 하나 더 추가된 것이다.

일본은 전 세계에서 노인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 비중이 23.1%에 달한다. 일하지 않는 인구의 증가는 경제활력 저하로 이어진다. 재정 복지 등 거시경제정책 전반을 결정하는 데도 고령화는 큰 영향을 미친다. 노인표가 늘어나는 만큼 복지지출은 증가하고,재정 부담은 커지게 된다. 그럼에도 정치인들은 표를 얻기 위해 매번 포퓰리즘 색채가 강한 공약을 내건다.

일본 경제가 빛을 발할 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감당하기에 숨이 차다. 어느 총리든 집권 후에는 '장밋빛 공약'을 이행하기 힘든 상황에 직면한다. 증세나 복지혜택 감축 등 '인기없는 정책'을 펼 수밖에 없다. 간 총리가 이번에 물러나게 된 배경 중 하나도 임기 중 추진했던 소비세 인상이다. 집권 전후의 말이 달라지다보니 신임 총리는 곧바로 인기를 잃게 된다. 각종 언론매체를 통한 지지율은 하락세를 그리게 되고,이는 총리 교체의 빌미가 된다.

한국은 아직 일본만큼 늙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령화 속도는 일본을 훨씬 앞선다. 포퓰리즘 성격의 복지 정책이 둥지를 틀 개연성도 크다. 정치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망가진 경제가 다시 정치인의 도덕성을 마비시키는 악순환.이게 꼭 남의 일만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요즘이다.

안재석 도쿄 특파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