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사고(史庫)에 보관돼 있던 조선왕실의궤가 일본으로 반출된 것은 89년 전인 1922년이었다.

이는 의궤에 찍힌 '舊藏 五臺山史庫 大正 11年 5月 朝鮮總督府 奇贈(구장 오대산사고 대정 11년 5월 조선총독부 기증)'이라는 도장을 보면 알 수 있다.

대정(다이쇼) 11년이 1922년이다.

한국은 1965년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고자 한일기본조약을 맺으면서 약탈 문화재도 반환하라고 요구했지만, 의궤는 궁내청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 돌려달라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의궤가 일본 땅을 떠돌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확인한 것은 천혜봉 성균관대 명예교수와 박상국 한국문화유산연구원장 등 서지(書誌)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일본 궁내청 쇼로부(書陵部)를 조사한 뒤 2001년 궁내청 소장 조선왕실 고문서 목록을 발간해 의궤의 존재를 고국에 알렸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식민지 시절에 기증된 것을 1965년에도 못 받았는데 이제 와서 돌려받기는 어렵지 않겠느냐'는 인식이 강했다.

여기에 도전한 것이 2006년 7월14일 도쿄대에서 조선왕조실록을 받아낸 봉선사 혜문 스님 등 불교계.정치계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두달 후인 2006년 9월14일 경복궁 광화문에서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를 '조선왕실의궤 환수위원회'로 이름을 바꿔 발족시켰고, 곧바로 환수 운동에 나섰다.

국회는 2006년 12월8일 의궤 반환을 요구하는 1차 결의를 발표해 이들을 지원했다.

환수위는 운동 초기만 해도 조선왕조실록 반환의 경험에 따라 북한의 협조를 이끌어내는 데 힘을 기울였지만, 이후 한일 외교 관계를 활용하는 쪽으로 차츰 방향을 틀었다.

정체됐던 의궤 반환 운동이 다시 본격화한 것은 지난해 초부터.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지난해 2월11일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일본 전 외무상을 만났을 때 의궤 문제를 언급했고, 국회는 같은달 25일 2차 결의를 발표했다.

여기에는 한일 외교를 중시하는 일본 민주당 정권이 한국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뭔가 '선물'을 주지 않겠느냐는 기대도 깔린 게 사실이다.

센고쿠 요시토(仙谷由人) 일본 전 관방장관이 지난해 7월21일 '일본이 의궤를 돌려줄 것'이라는 국내 한 신문의 보도에 대해 한국 정부로부터 의궤를 돌려달라는 요청조차 들은 적이 없다고 부인했을 때만 해도 이같은 기대가 물거품이 되는 듯했지만,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는 지난해 8월10일 한국병합 100년 사죄 담화에서 "일본이 통치하던 기간에 조선총독부를 경유하여 반출돼 일본 정부가 보관하는 조선왕실의궤 등 한반도 유래 도서를 인도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명박 대통령과 간 총리가 지난해 11월14일 일본 요코하마(橫浜)에서 '조선총독부를 거쳐 일본에 반출된 도서 1천205책을 인도한다'는 내용의 한일도서협정에 서명한 것은 이 담화의 결과였다.

이후엔 일본 국회 내부의 진통이 이어졌다.

제1야당인 자민당이 민주당 정권을 궁지에 몰아붙이고자 좀처럼 도서협정 비준에 동의하지 않고 애를 먹였기 때문이다.

자민당은 올해 정기국회에서도 "한국으로 건너간 일본 도서도 돌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독도 영유권 문제를 거론하는 등 모종의 '대가'를 요구하며 도서협정 심의에 반대했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약탈한 도서를 돌려줘야 한다는 주장에 동조하는 이들은 일본 내에서도 점점 늘어났고, 급기야 공명당 등이 도서협정 비준에 찬성하겠다고 밝히면서 자민당도 어쩔 수 없는 지경으로 몰렸다.

그 결과 중의원(하원)이 28일 본회의에서 도서협정을 '사실상 비준'하기에 이르렀다.

참의원(상원) 심의가 있긴 하지만, 일본 헌법상 조약은 중의원 결정이 우선하는 만큼 이제 의궤의 '89년 만의 귀국'을 막을 장애물은 더는 남아있지 않다.

(도쿄연합뉴스) 이충원 특파원 chungwo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