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는 밤새 추모 행렬.."기장, 관제탑 지시 거부"

10일 러시아 서부 스몰렌스크에서 발생한 비행기 추락 사고로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 부부 등 폴란드 주요 인사 들을 포함해 탑승자 97명 전원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대통령을 비롯한 지도급 인사들을 한꺼번에 잃은 폴란드는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으며 폴란드 전역에서는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행렬이 밤새 이어졌다.

세계 각국 정상들도 애도의 뜻을 표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사고 발생 직후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를 사고 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철저한 진상조사를 약속하는 등 이번 사건이 양국관계에 미칠 악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고 수습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 시신 97구 모두 수습 =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비상대책부 장관은 이날 사고 현장을 방문한 푸틴 총리에게 사고 개요를 보고하면서 "카친스키 대통령을 비롯해 희생자들의 시신을 모두 수습했으며 인근 병원으로 옮겼다"고 말했다.

사고기에는 당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승무원 8명을 포함해 모두 97명이 탄 것으로 확인됐다.

러시아 당국은 가족들의 신원 확인을 위해 시신을 모스크바로 옮길 예정이며 훼손 정도에 따라 DNA 검사도 한다는 방침이다.

처참한 사고 현장을 찾은 카친스키 대통령의 쌍둥이 형제인 야로슬라브 카친스키 전 총리는 대통령 부부의 시신을 확인했다고 러시아 관영 리아 노보스티 통신이 보도했다.

러시아 비상대책부는 앞서 카친스키 대통령 등 폴란드 정부 대표단을 태우고 바르샤바에서 출발한 러시아제 Tu(투폴레프)-154 비행기가 이날 오전 10시 56분께(현지시간) 모스크바에서 서쪽으로 350km 떨어진 스몰렌스크 공항 활주로 부근에 추락,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폴란드 정부 대표단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지난 1940년 옛 소련 비밀경찰이 폴란드인 2만2천명을 처형한 '카틴 숲 학살 사건' 추모 행사에 참석하려고 러시아를 찾았다가 변을 당했다.

◇ 기장 관제탑 지시 거부..왜? = 러시아 검찰과 항공 당국에 따르면 사고기는 공항 주변에 짙은 안개가 낀 상태에서 착륙을 시도했고 활주로에서 300여m 떨어진 숲 속 나뭇가지 끝에 기체가 부딪힌 후 곧바로 땅으로 곤두박질치면서 폭발, 화재가 일어났다.

특히 러시아 당국은 사고기 조종사가 벨라루스 민스크로 회항하라는 관제탑의 지시를 무시하고 4번이나 무리하게 착륙을 시도한 이유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사를 벌이고 있다.

한 공군 고위 관계자는 "통제관의 말을 따르지 않고 조종사가 하강 속도를 높였다"면서 "다른 공항(벨라루스 민스크)으로 회항하라는 지시도 무시했다"고 말했다.

항공 사고 전문가들은 시계가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착륙을 시도하다 기체가 나뭇가지에 걸리자 통제 불능 상태에 이르면서 추락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러시아 당국은 그러나 기체 결함 등 다른 요인도 배제하지 않는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 관계자는 "아직 정확한 사고 원인을 말하기 어렵다"면서 "회수한 비행기록장치(블랙박스)에 대한 분석 작업이 끝나면 정확한 원인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 폴란드 밤새 추모행렬 = 슬픔에 빠진 폴란드 국민들은 붉은 장미와 흰 장미, 촛불을 들고 수도 바르샤바의 구시가지에 있는 대통령궁으로 찾아가 애도를 표했다.

대통령궁에는 조기가 게양됐고 바르샤바 주택가 곳곳에도 폴란드 국기가 내걸렸다.

성당에서는 희생자들을 위한 미사가 열렸다.

야니나 세바스티노브(78) 씨는 AFP 통신에 "장을 보다가 대통령이 사망했다는 아들의 전화를 받고 온몸이 굳었고 거의 실신할 뻔했다"면서 "모두 훌륭한 분들로, 그들을 잃는 것은 보상받는 것이 불가능한 막대한 손실"이라고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도널드 투스크 폴란드 총리는 "폴란드 전후사에서 가장 비극적 사건으로, 현대사에서 이런 류의 비극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

투스크 총리는 이날 오후 사고 현장을 방문, 현장을 둘러보고 희생자들을 위해 헌화했다.

대통령 권한대행인 브로니슬라브 코모로브스키 하원의장도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있다"면서 "여기에는 좌도, 우도 없다"고 말했다.

폴란드 정부는 일주일간 애도 주간을 선포하는 한편 11일 정오에 2분간 전국에서 묵념 의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메드베데프 대통령도 폴란드 국민에게 조의를 표하고 12일 하루를 국가 애도의 날로 선포했다.

◇ 각국 정상 애도 이어져 =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폴란드는 물론 미국과 세계에 엄청나게 충격적인 손실"이라며 애도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투스크 총리에 전화를 걸어 카친스키 대통령 부부와 폴란드 정부 고위 관리들이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한 데 대해 깊은 조의를 전했다.

유럽연합(EU)은 갑작스런 비극을 당한 폴란드 국민을 위로하는 메시지를 발표했으며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면서 애도를 표명했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와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도 카친스키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했다.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은 "이번 비극은 수십 년 전 비행기 추락 사고로 숨진 시코르스키 장군의 의문의 죽음을 다시 기억하게 만들었다"면서 폴란드 역사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모스크바.베를린연합뉴스) 김경석 남현호 특파원 kskim@yna.co.krhyunh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