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에서 창녀를 제거하면 정욕이 세상을 혼란에 빠뜨릴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점잖은 거리와 도심에서 창녀를 추방하고 재산을 몰수하라”(프랑스 루이9세)

유희수 고려대 교수의 신간 『사제와 광대』에는 매우 흥미로운 중세의 논쟁사가 소개돼 있다. 바로 성매매를 둘러싼 철학자와 정치인들의 논란과 시각차를 다루고 있는 것. 눈길을 끄는 점은 지난 몇년간 ‘성매매 특별법’도입 이후 한국사회에서 논의된 성매매 논란의 주요 논리들이 천여년전 중세 유럽에서 매춘을 둘러싼 논란과 판박이처럼 비슷하다는 점이다.



‘자연발생적’인 성매매를 억지로 근절할 경우 ‘풍선효과’만 불러 일으킨다던지, 욕망의 출구를 봉쇄해버려 강간 등 성폭력이 증가할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은 천년전 유럽에서도 똑같이 제기됐다. 반면 도덕적 원칙에 따라 도심에서 매춘시설을 없애버리고, 교육과 교화로 매춘부들을 갱생한다는 오늘날 ‘성매매 특별법’의 대책이 떠오르는 중세시대 정책도 만날 수 있다.

유 교수에 따르면 매춘에 대한 중세교회의 기본 태도는 매춘을 비난하면서도 불가피한 사회현실로 인정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매춘으로 이익을 얻는 자인 뚜쟁이를 더 사악하게 보고, 창녀에겐 갱생을 권장하는 교과서적인 처방만 내릴 뿐이었다고.

매춘에 대한 중세의 이같은 기본적인 태도는 대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제공했다.아우구스티누스는 “만일 사회에서 창녀를 제거하면 정욕이 세상을 혼란에 빠뜨릴 것이다”라고 역설했다.

요즘에도 어디선가 많이 들어봤음직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의 요지는 매춘은 불완전한 현실 세계에서 기혼자의 아내와 딸을 보호하고 더 나쁜 악을 예방하기 위한 ‘필요악’이라는 것이었다.

중세 시대 매춘은 도시화가 어느정도 진전된 12세기 이후 본격화됐다. 이런 저런 규제와 도덕강조에도 불구하고 매춘이 사라지기는 커녕 계속해서 확대돼 가자 13∼14세기 신학자들과 설교가들은 매춘은 필요악이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매춘관을 환기하면서 매춘부의 역할과 유용성에 대해 얘기하는 것으로 태도를 바꿨다.

심지어 대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매춘이 공공선을 함축하고 있다는 이유로 매춘에 대해 관용의 원칙을 전개하기까지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을 계승한 설교가인 톨로메오 다 루카(1236-1327)는 “창녀와 사회의 관계는 궁정과 하수구의 관계와 같다”며 ‘하수구론’을 설파했다.하수구를 없애면 모든 궁정은 오물로 가득할 것이라며 매춘을 ‘필요악’일 뿐 아니라 ‘공공선’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격상시켜 버렸다. 오늘날 성매매 특별법 비판론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비슷한 요지의 주장을 펼친 것이다.

심지어 알랭 드 빌은 “함께 잔 여자가 예쁘다면,매춘의 죄를 범한 남자의 참회고행을 완화해 줘야 한다”고 까지 과감한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남성의 죄를 여자탓으로 돌린데 이어 기혼자들의 공익을 위해 총각이나 홀아비의 욕망을 ‘예쁘고 매력적인’창녀에게 돌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창녀가 예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이런 세태를 반영하듯 12세기부터는 유럽의 주요 왕정과 시 당국은 왕국의 도덕질서를 보호하기 위해 매춘을 부정하고 금지하기보다는 일정한 지역에 한정해서 허용하는 모호한 정책을 시행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런 도덕이 무너진 상황을 그대로 볼 수만은 없다고 적극적으로 개입한 정치인들도 있었다. 프랑스에선 루이9세가 매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인물이다. 그는 1254년 12월 매춘부들을 도시에서 축출하고 그들의 재산과 옷까지 몰수토록 하는 중세 유럽판 ‘성매매 특별법’을 실시했다. 루이9세는 창녀갱생원을 설립해 갱생한 ‘거리의 여인’들에게 4000리브르라는 거액의 연금을 지불토록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갱생한 창녀는 200명에 불과했고, 나머지 창녀들은 대로상으로 밀려나 장소만 바뀌었을 뿐 성매매가 근절되지 못하는 ‘풍선효과’가 발생해 버렸다고 한다. 창녀를 완전히 사회에서 추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이 드러나 버린 것이다.

창녀를 점잖은 거리와 도심에서 추방하고 교회나 수녀원 같은 성스러운 장소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 1256년 추가조치는 역설적으로 성매매의 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는 징표가 돼 버렸다.

결국 “아비뇽 다리를 건널때 마다 두명의 수도사와 두명의 당나귀,그리고 두명의 창녀를 만난다”는 말이 나올정도로 매춘이 사라지지 않음에 따라 매춘장소와 매춘부를 지칭하는 용어도 ‘중성화’되기 시작했다.

단순히 매춘지역이나 매춘이 이뤄지던 집을 의미했던 용어들이 매춘의 ‘공익성’을 함축하는 ‘퍼블릭 하우스(maison publique,hostal publique)’나 ‘좋은 집(bonne maison)’등으로 바뀌었다. 매춘부를 지칭하는 말도 경멸적 의미가 담긴 meretrix publica에서 중성적 의미의 mulieres publice(public women)으로 대체됐다. 매춘의 ‘공익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용어가 바뀐 것은 공창제의 탄생과 관계가 깊다는 게 역사가들의 설명이다.

결국 15세기 중반에 이르면 600가구 미만의 소도시였던 타라스콩에서도 공창이 10여명에 달했고,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는 사창까지 포함하면 중세말 인구대비 창녀 비율은 19세기말이나 20세기초와 차이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매춘에 대해선 금지보다는 제도화하며 ‘더 큰 악’을 예방한다는 정책이 취해졌다. ‘더 큰 악’이란 기혼자의 부인과 딸에 대한 간통이나 성폭행을 의미하는 것으로 공창이 통제가 쉬울 것이란 점도 이런 주장의 근거로 제기됐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매춘에 대한 죄의식도 엷어져서 “매춘을 한 당사자들은 매춘이 즐거움을 준다면 하느님도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돈을 주고 즐기는 것은 죄가 아니다”라고 까지 생각하게 됐다. 이에 따라 미혼청년들의 사창가 출입은 사회적으로 ‘정상상태’로 용인됐고, 오히려 매음굴에 출입하지 않은 청년들이 동료들로부터 동거녀를 두고 있다는 의심을 받거나 예비 성폭행범으로 우려됐다고 한다.

천여년전 머나먼 서양 중세시대에 대한 글을 읽다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해결을 보지 못하고 계속 떠돌고 있는 논리와 너무나 유사한 천여년전 사례를 접해 간략히 정리해 봤다. 어찌보면 사람은 변하지 않는 존재인듯도 싶고, 하늘아래 새로운 생각도 없는 듯 하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논쟁도 결국 결과를 보지 못하고 또다시 천여년의 시간을 흘리게 될지, 아니면 결론을 낼 수 있을지도 잠시 궁금해진다.


<참고한 책>

유희수, 사제와 광대-중세 교회문화와 민중문화, 문학과지성사 2009

이석우, 아우구스티누스, 민음사 1995

Klaus Bernath(Hrsg.), Thomas von Aquin-Chronologie und Werkanalyse,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Darmstadt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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