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위기인가, 기회인가
['新유럽' 탄생] (4)27개국 '하나의 규제'…이젠 'EU 사인'만 받으면 된다

유럽합중국 등장에 한때 회의적이었던 영국에선 "간섭하기 좋아하는 유럽연합(EU) 관료들이 영국의 오랜 전통을 모두 바꿀 것"이라는 루머 시리즈가 유행했다.

예를 들어 근로자들의 피부암 예방을 위해 지나친 햇빛 노출을 막으라는 유럽의회의 권고는 "술집 여종업원은 가슴 골을 드러내선 안 된다"는 권고로 탈바꿈됐고,영국의 스낵인 '봄베이 믹스'는 제국주의 유산을 없애야 한다는 EU관료들의 주장 탓에 '뭄바이 믹스'로 바꿔야 한다는 식으로 변형됐다.

이 '유로 미신'은 유럽 전체 차원의 획일적 간섭을 비꼰다는 공통점을 지녔지만 유럽합중국의 핵심을 반영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로마제국 붕괴 이후 분열됐던 유럽이 통일된 단일체로서 하나의 규제가 적용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종규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그동안 유럽에선 특정 제품에 많게는 1000여개의 환경 관련 규제가 국가별로 제각각 적용돼 시장 공략 비용이 컸다"며 "유럽합중국 출범으로 유럽 전체의 규제 수준은 평균적으로 높아질 것으로 보이지만 대신 하나의 단일한 규제만 지키면 돼 기업들로선 득이 더 많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규제 단일화 기대

유럽합중국 출범은 한국 등에 위기이자 기회다. 단일화되고 힘이 세진 EU는 외부 세계가 공략하기에 더 버거운 상대가 됐다. 반면 복잡성과 다양성이 크게 줄었다는 점에선 기회가 생긴 측면도 있다.

김득갑 삼성경제연구소 글로벌연구실장은 "유럽합중국 등장으로 무역장벽은 높아질 수 있지만 공략법이 단순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미국 기업들도 환영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특히 리스본조약 발효로 EU와 개별 회원국 간에 불분명했던 권한들이 확실히 구분된 점은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리스본조약에서 EU이사회와 의회,집행위 등에 배타적 권한으로 △관세동맹 △역내시장 운영에 필요한 경쟁규칙 확립 △유로 지역 통화정책 △공동 통상정책 △국제협약 체결 등을 부여했다. 공동 통상정책엔 외국인 직접투자 등에 대한 정책도 포함된다.

한마디로 EU당국만 제대로 공략하면'톱다운'방식으로 유럽 각국에 대한 효율적인 진출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현재도 EU집행위와 의회에서 발의하는 법안이 유럽 각국 법안의 80%가량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통일법안의 입안자로서 EU당국의 중요성은 더 높아지게 됐다. 독점적 지위남용,가격담합,합병규제,특허위반 등 기업의 생사를 좌우할 주요 규제 조항도 EU당국에서 제정한다.

예를 들어 환경 관련 규제의 경우 지금까진 27개 회원국마다 서로 달라 EU 회원국 환경규제 현황에 대해 전부 알려면 수천건의 법률을 살펴봐야 했다. 화학첨가물질 프탈레이트 사용을 0.1%까지 허용한 EU 기준에 맞춰 생산한 완구류는 프탈레이트를 0.05%까지만 사용할 수 있다는 별도 규정을 적용하고 있는 덴마크에는 수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EU 공통의 기준만 충족시키면 27개국에 자유롭게 수출이 가능해진다.

EU당국은 또 사회정책,경제 · 사회 · 지역적 통합,환경,소비자보호,운송,에너지,유럽운송망 등에서 회원국과 권한을 공유한다.

회원국의 재정적자가 과도할 경우 EU집행위가 회원국에 경고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갖게 됐다. 순수하게 회원국이 결정할 수 있는 분야는 산업정책 외에 위생과 보건,문화,관광,공공안전 등으로 축소됐다.

핵심 경제정책도 EU당국과 각 회원국 간 공동으로 결정하게 된다. 유럽중앙은행(ECB)이 EU 기관 중 하나로 권한이 확대되면서 거시경제 정책에 대한 감독권도 갖는다.

ECB는 유로지역 외에 비유로지역을 포괄하는 유럽 전체 지역에 대한 관할권을 지닌 통화당국으로 자리를 굳혔다. 이 밖에 유럽합중국은 공동 조세법도 제정할 수 있다. 다른 회원국 상품과 국내 상품에 부과하는 세금 간 균형을 유지토록 한 것이다. 자국 상품을 간접적으로 보호하는 역내 지역 보호주의를 막을 수 있는 권한도 부여됐다.

◆발빠른 대응 나선 다국적 기업
['新유럽' 탄생] (4)27개국 '하나의 규제'…이젠 'EU 사인'만 받으면 된다

범유럽 정책의 결정자로서 EU당국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다국적 기업들은 로비를 강화하고 나섰다. 이미 엑슨모빌 제너럴일렉트릭(GE) 휴렛팩커드(HP) 월마트 마이크로소프트 시노펙 등 비유럽권 주요 기업들이 적극적인 대EU 로비전을 진행하고 있다. 도요타와 소니는 대규모 로비 인력과 자금을 동원하며 '유럽의 머리'인 EU당국을 톱다운 방식으로 공략하고 있다.

EU가 환경 문제를 인류가 직면한 가장 중대한 과제로 인식하고 있는 만큼 기후변화와 탄소배출권 거래 등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리스본조약은 "환경 개선과 보호를 바탕으로 한 EU의 지속성장"을 목표로 삼고 2020년까지 탄소배출을 1990년에 비해 20% 이상 감축할 것을 표명한 상태다.

환경이나 기술표준에 있어 역내 규제 수준이 크게 높아질 가능성이 커졌다. 실제 EU 당국은 폴란드 불가리아 에스토니아 슬로베니아 등에 환경오염을 경고하는 등 환경규제를 무기화하기 위한 정지 작업을 진행 중이다. 김은중 외교통상부 유럽국장은 "리스본조약으로 유럽의 의사결정 체계가 정비됐다"며 "한국도 새로워진 유럽의 의사결정 체계에 대한 체계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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