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중국 난징에서 열린 중국과 유럽연합(EU) 간 12차 정상회의에서 중국은 "위안화 환율을 절상하고 온실가스 감축에 보다 전향적으로 나서라"는 EU의 공세에 진땀을 뺐다. 원자바오 중국 총리가 "중국을 지나치게 압박하는 것은 불공평한 처사"라며 볼멘소리를 내놓을 정도로 중국은 수세에 몰렸다. 불과 몇 주 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고자세를 보이며 전 세계에 '차이나 파워'를 과시하던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유럽합중국의 부상에 따른 유럽의 격상된 위상이 여실히 반영된 장면이었다.

'유럽합중국' 탄생으로 글로벌 질서에 새판짜기가 분주해지면서 '유럽호'를 이끄는 실질적인 선장이 누구인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과거 미국의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은 '유럽과 얘기하려면 도대체 누구와 통화해야 되나'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유럽합중국이 첫발을 떼면서 관심은 유럽대표로 '전화를 받는'지도자는 누구일지,전 세계에 '전화를 거는'인물은 누구일지에 집중되고 있다.

◆약체라고? 유럽대표의 파괴력은 시스템에서 나와

유럽합중국은 탄생했지만 전 유럽을 대표하는 얼굴은 누구인지 아직 불명확한 게 사실이다. 일단 형식적으로는 'EU대통령'이라 불리는 헤르만 판 롬파위 EU정상회의 상임의장이 유럽합중국호의 대표로 꼽힌다.

하지만 롬파위 상임의장 본인이 당선 직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EU에 전화할 때 누구에게 할 거라고 생각하나'란 질문에 "안절부절 못하면서 첫 번째로 전화가 오기를 기다릴 것"이라는 조크성 답변을 내놓은 데서 보이듯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EU정상회의 상임의장과 EU집행위원장,EU의회 의장 등 대외적으로 EU를 대표하는 조직들이 분산된 데다 새로 출범한 EU합중국의 대외문제는 외교안보 고위대표(EU외교장관) 담당인 만큼 명실상부한 '넘버1'대표를 뽑기 위해선 내부'교통정리'가 조금 더 필요한 상황이다.

같은 맥락에서 초대 'EU대통령'에 유럽 강대국과 소국 간 세력균형의 산물로 '관리형'롬파위 전벨기에 총리를 선출하자 '약체 대표'를 뽑았다며 유럽 내부에서 비판이 쏟아지기도 했다.

이에 따라 당분간은 EU의 각종 정책결정과 집행을 맡고 있는 EU집행위가 EU의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보인다. 바로수 EU집행위원장의 주가도 오르고 있고,최근 새로 임명된 미셸 바르니에 역내시장담당 집행위원(프랑스),카렐 데 휘흐트 통상담당 집행위원(벨기에),호아킨 알무니아 경쟁담당 집행위원(스페인),귄터 오팅어 에너지 담당 집행위원(독일) 등도 실세로 거론된다.

이들과 함께 유럽합중국의 막후 실세로 유럽정치의 거목인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등 '빅3'의 영향력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과거 유럽 통합 과정을 역사적 · 장기적 관점에서 살펴볼 때 앞으로도 EU상임의장이 '허세 얼굴마담'에 머물 것이라고 보는 시각은 많지 않다. 유럽은 전통적으로 출범 초기엔 약소국 출신 관리형 인물을 대표로 내세웠다가 일단 조직이 자리잡은 뒤에는 강국 출신 실세를 리더로 뽑아 국제무대에서 제 목소리를 내는 전략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실제 1998년 유럽중앙은행(ECB)이 처음 출범할 당시도 경제강국 독일이나 유럽 외교의 주역 프랑스 출신이 아니라 소국인 네덜란드 출신 빔 두이젠베르크를 초대 총재로 내세우며 조용한 출발을 한 뒤 유럽경제의 수장자리를 강국(프랑스)출신 실세 장 클로드 트리셰 총재에게 넘긴 바 있다.

◆유럽 현 지도부는 '재무통'이 주류


세력균형을 핵심 키워드로 삼고 있는 '유럽합중국'은 지도부 구성에서도 다양한 전공과 배경을 갖춘 리더들이 골고루 포진해 있다. 핵심 실세들은 주로 재무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재무통'들이 주류를 구성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EU 힘의 근원이 막강한 경제력,특히 금융정책에 있음을 상기할 수 있는 부분이다.

롬파위 초대 상임의장은 루뱅대에서 경제학 석사를 취득한 뒤 벨기에 중앙은행과 예산부 장관 등을 거친 전형적인 경제 · 재무 분야 전문가다. EU집행위의 실질적인 파워를 발휘하는 역내시장담당,통상담당,경쟁담당 집행위원직도 재무통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역시 10년간 재무장관을 역임하며 영국 경제정책을 좌지우지했었다. 범유럽 차원 정책결정에서 강한 입김을 불어넣는 인물인 장 클로드 융커 유로그룹 의장과 장 클로드 트리셰 ECB 총재도 모두 재무장관을 지냈다.

이에 비해 바로수 EU집행위원장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법학을 전공했고,메르켈 독일 총리와 예르지 부제크 유럽의회 의장은 공학박사 출신이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