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의 정치적 결속을 강화하는 내용의 '미니 헌법'인 리스본조약이 1일 발효되면서 마침내 '유럽합중국'이 탄생했다. 존 스튜어트 밀에서 나폴레옹,마치니,가리발디를 거쳐 무정부주의자인 바쿠닌까지 꿈꾸던 '하나의 유럽'이 드디어 현실이 된 것이다. 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가 "유럽 대륙의 모든 민족이 하나의 형제애를 나누는 날이 올 것"이라고 1849년 파리 국제평화회의에서 외친 예언이 마법처럼 이뤄진 셈이다. 유럽합중국은 '늙은 대륙'이란 오명을 벗기 위한 카드다. 일각에서 유럽합중국 탄생을 '제2의 르네상스'로 비유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정치 난쟁이'에서 '진정한 거인'으로


이제 유럽은 '경제 거인 · 정치 난쟁이'에서 다른 수식어가 필요없는 '거인'으로 거듭나게 됐다. 리스본조약이 발효되면서 5억명의 인구를 지닌 EU는 이제 경제문제 외에도 외교와 안보까지 공동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본 틀을 갖추게 됐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EU가 단순 국가 연합체에서 벗어나 유럽을 대표하는 결정권을 지닌 법적 공동체로서의 위상을 갖게 된 것이다. 외교와 안보 통합 등 본격적인 국가 공동체로 발전하는 단계에 진입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김득갑 삼성경제연구소 글로벌연구실장은 "유럽합중국의 출발은 완벽하게 틀을 갖춘 로마제국의 부활이라고 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유럽이 점진적 방식을 통해 혁신적 변화를 이뤄온 점을 감안하면 유럽의 정체성을 180도 바꾸는 혁명적 사안"이라고 말했다.

'유럽합중국' 출범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적지 않다. 우선 EU의 권한이 강화되고 효율성이 높아진 점이 주목된다. 그동안 위상이 불분명하고 역할이 겹치던 EU의 3대 기관인 유럽이사회와 유럽의회,EU집행위의 시스템을 정비한 점은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이사회 의장(EU 대통령)과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EU 외교대표)를 갖춘 유럽이사회는 국제사회에서 EU를 대표하기 시작했다. EU는 특히 만장일치제 대신 신속한 결정이 필요한 사안에 대해 이중다수결제도를 2014년부터 실시키로 해 정책 결정의 신속성을 높였다.

여기에 유럽중앙은행(ECB)의 권한을 종전 유로화 사용 지역에서 비유로 지역을 포함한 전체 EU로 확대하고 국제 분쟁 공동 대응 범위와 재원을 명문화하는 등 공동 외교안보 정책에 관한 내용을 구체화했다. 한마디로 이제 EU합중국은 단순한 상징적 존재가 아니라 '돈'과 '칼'이라는 현실정치의 주요 수단까지 갖춘 실체로 자리잡은 것이다.

◆세계질서 재편 예고

유럽합중국은 글로벌 정치 · 경제 무대에서 유럽 개별 국가들이 위축되고 있는 현상을 타개하기 위한 반전 카드로 등장한 성격이 강하다. 과거 서유럽 주요 국가들이 주축을 이뤘던 주요 7개국(G7)을 아시아로 축이 옮겨진 'G20'이 빠르게 대체해 버린 데다 실질적으로는 유럽이 배제된 채 미국과 중국의 'G2'가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유럽합중국은 외형적으로 'G2 견제'를 넘어 'G3체제'라는 새로운 세력 균형을 이룰 힘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이미 15조3000억달러 규모의 GDP(국내총생산)를 갖춘 EU는 미국(14조30억달러)과 중국(4조8300억달러)을 뛰어넘는 세계 최대 경제블록이다. 여기에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아이슬란드 등의 EU 가입 논의가 리스본조약 발효로 재개됨에 따라 유럽 통합의 범위가 확대되고 경제 규모도 더 커질 전망이다. 특히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안정성이 부각된 유로화는 달러에 이어 제2의 국제통화로 힘을 키우고 있다.

물론 강대국 간 힘의 균형 논리로 약체 대통령을 뽑았다거나,실질적으로 국제무대에서 단일 목소리를 내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지적도 없지 않다. 하지만 유럽은 정치무대에서도 여전히 제국주의 시절 '닳고닳은' 글로벌 경영의 노하우를 간직한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

한경·삼성경제연구소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