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최고의 낭만적 연인”으로 불린 시인 바이런은 오늘날의 정형화된 흡혈귀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말끔히 면도한 창백한 안색에 이국적인 생김새, 부드럽고 자극적인 음성, 느릿느릿한 행동거지’라는 고전적인 뱀파이어에 대한 인상은 바로 대시인 바이런에서 기인한 것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아이돌그룹 ‘2PM’의 닉쿤에 비견될 만큼 우유빛이 도는 뽀얀 피부에 이국적인 우아함이 묻어나는 (그래서 큰 인기가 있던) 바이런이 호러물의 주인공이 된 셈이다.(하긴 닉쿤도 얼마전 뱀파이어로 분장한 아이비에게 ‘당하는’ 퍼포먼스를 펼쳤고, 최근에는 심장이 펄떡펄떡 뛰는 것을 모티브로한 노래도 부르고 있으니 흡혈귀 이미지와 인연이 없지는 않은 듯 하다.)



바이런에 앞서 괴테에서 쿨리지 등 수많은 대문인들이 뱀파이어를 다룬 글을 썼고, 바이런 자신도 『불신자』라는 작품에서 흡혈귀를 등장시켰다고는 하지만 그가 흡혈귀의 모델이 된 것은 그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바로 바이런의 주치의였던 존 폴리도리가 1819년 『흡혈귀』라는 저서를 출간했는데, 책을 많이 팔기 위해 당시 ‘잘 나가던’ 바이런의 명성에 기대는 큰일을 벌이게 된다. 바로 폴리도리작이 아니라 바이런의 작품으로 『흡혈귀』를 판매했던 것이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바이런이 쓴 작품인 줄 알고 이 책을 접한 독자들은 소설에 등장하는 흡혈귀가 바이런의 분신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들은 바이런 자신의 경험을 소설 형태로 풀어놓은 자전적 소설로 『흡혈귀』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원래 서구 민담에 등장하는 흡혈귀는 “희생자의 가슴팍을 물어뜯는 사납고 난폭한 털복숭이 사내”로 묘사됐다고 한다. 그러나 시대가 흘러 소설 주인공으로 되면서 외모가 업그레이드돼 귀티가 흐르는 창백하지만 우아한 귀족의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아졌고 최근 들어선 10대들이 좋아할 만한 꽃미남의 형태로까지 진화했다. 바로 그 시원에는 꽃미남 시인이었던 바이런이 있는 셈이다.

독자들은 바이런이 저술한 것으로 잘못 선전된 폴리도리의 책에서 흡혈귀 클래런스 드 루스밴이 순진한 처녀와 감수성 예민한 미녀들을 공격해 피를 빠는 것에 열광했다.



그런데 이 루스벤이라는 흡혈귀는 폴리도리의 책에서만 등장하는 게 아니었다. 바로 폴리도리의 책이 출간되기 3년전 바이런의 정부였던 레이디 캐롤라인 램이 출간한 『글래나본』이란 책에도 루스벤이란 뱀파이어가 나온다고 한다.

문제는 캐롤라인 램이 바이런에게 가혹하게 버림받은 데 대한 앙갚음으로 책을 집필하면서 바이런이 흡혈귀로 몰리는 계기가 마련됐다는 것이다. 누가 봐도 이 책에 묘사된 흡혈귀 루스벤이 바이런이라는 것을 손쉽게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이다.

“까맣고 열정적인 눈빛”이라던가 “뜨거운 정열이 깊이 스며있는 영혼”, “자신이 던지는 어떤 혹독한 말투도 부드럽게 휘감아 버리는 우울하고 침울한 분위기”등의 묘사를 통해 흡혈귀의 성격과 유명인사 바이런의 성격 및 외모가 유사하다는 것을 당대인들은 손쉽게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결국 이 두권의 책은 바이런을 둘러싸고 돌던 흉흉한 소문에 불을 붙였고 순식간에 그는 흡혈귀 모델의 대명사가 돼 버렸다. 심지어 바이런이 애인 한명을 살해해서 그녀의 두개골로 잔을 만들어 피를 마셨다는 소문마저 그럴듯한 사실로 살이 붙어 퍼졌다.

다른 한편으로 (바이런이 흡혈귀 모델이 되버린 덕분에) 사람들은 “흡혈귀가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유혹과 섹슈얼리티의 소유자”라는 인식도 확고히 갖게 됐다. 바이런 덕분에 흡혈귀는 무식하고 저돌적인 늑대인간이나 프랑켄슈타인에 가까운 이미지에서 창백하고 우아한 귀족 이미지를 덧쓰게 된 것이다.

이후 이런 저런 과정을 거치면서 흡혈귀는 대중의 잠재의식 속에 에로티시즘과 공포, 피와 죽음이 조합된 복잡한 이미지로 각인됐다.

최근 ‘뱀파이어 신드롬’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꽃미남’,‘우아한 여인’들이 등장하는 흡혈귀 영화들이 쏟아지고 있다. 신문에 등장하는 뽀얗고 잘생긴 흡혈귀 사진들을 보면서, 시대가 지나면서 흡혈귀가 지닌 무서운 요소는 점점 사라지고 애로티시즘과 매혹과 관련된 요소만 계속 부각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바이런은 자신이 흡혈귀 모델로 몰렸을 때 어떤 느낌을 가졌을지, 오늘날 흡혈귀 영화에 등장하는 선남선녀들을 보았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지도 문득 궁금해졌다.


<참고한 책과 사이트>
린다 손탁, 유혹,아름답고 잔혹한 본능, 남문희 옮김, 청림출판 2004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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