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19일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방북을 공식화하기까지 미국과 북한은 지루한 기싸움을 벌여왔다.

특히 장거리 로켓 발사와 2차 핵실험 강행으로 한반도 정세를 위기 속으로 몰아넣었던 북한이 갑작스럽게 평화공세로 전환한 이후 양측은 그야말로 피말리는 신경전을 거듭했다.

사실 오바마 정부의 출범에 대해 북한은 애초 상당한 기대를 피력했다.

대표적인 것이 2009년 1월 1일 북한의 신년 공동사설이었다.

공동사설은 "조선반도 비핵화를 실현하고 동북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수호하기 위한 우리 공화국의 자주적인 대외정책의 정당성은 날이 갈수록 더욱 힘 있게 과시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북한문제 전문가들은 이런 신년 사설의 비핵화 언급을 곧 출범할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를 향한 우호적 메시지로 해석했다.

한국 정부에 대해선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의 이행을 요구하며 험악한 말을 퍼부으면서도 오바마 정부에 대해선 협상 의지를 과시한 것이다.

당시 일각에서는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식(1월 20일)을 전후해 김계관 외무성 부상 등 북한 고위 관계자의 방미가 추진될 가능성을 제기했었다.

북한은 비공식 채널을 통해서도 우호적인 언사를 전해왔다.

2008년 10월28일부터 11월1일까지 방북했던 미 조지아대 박한식 교수는 "북한 최고위층이 오바마 정권 출범을 계기로 북미관계 개선을 굉장히 바라고 있으며, 이에 대한 의지가 강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북한은 6자회담 종식을 선언함과 함께 미국과의 직접대화를 요구했다.

지난 2월 민간인 신분으로 방북한 보즈워스에게 김계관 부상은 6자회담을 완전 배제하지 않았지만 오바마 정부와의 양자협상을 원하는 평양의 속내를 솔직히 전했다.

하지만 미국은 반응하지 않았다.

대공황 이후 최대의 위기상황에 처한 국내 경제상황도 그렇지만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문제 등 다른 외교적 문제가 오바마 정부의 운신을 제한했다.

그러자 북한은 서서히 미국을 자극하는 행동에 나섰다.

미국은 지난 2월3일 북한이 대포동 2호 미사일 시험발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징후를 포착한다.

그 직후 대북정책 특별대표로 임명된 보즈워스는 방북의사까지 피력하며 북한과의 대화를 요구했다.

그러나 방북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로켓 발사를 하지 않겠다는 것을 먼저 약속하라고 북한을 압박했다.

결국 북한은 보즈워스의 방북을 거부했고, 4월5일 끝내 장거리 로켓 `광명성 2호'를 발사했다.

당시 체코 프라하에서 `핵무기 없는 세계구상'을 발표하던 오바마 대통령은 즉각 `미사일 시험발사'로 규정하며 국제사회의 강력한 대응을 촉구한다.

북한도 주저하지 않았다.

4월1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6자회담 불참과 핵시설 원상복구 방침을 발표했고, 5월25일에는 2차 핵실험마저 강행하고야 만다.

북한으로부터 `뺨'을 맞은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의 핵실험 강행 직후 `북한의 핵무기 개발 시도는 탄도미사일 프로그램과 함께 국제평화와 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고, 결국 6월13일 유엔 안보리는 북한의 2차 핵실험에 따라 무기금수와 화물검색, 금융제재 등 대북 제재를 담은 결의 1874호를 채택했다.

북한은 외무성 성명을 통해 안보리 결의가 나오던 날 이에 대응해 추출한 플루토늄의 전량무기화와 북한을 봉쇄할 경우 군사적 대응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과정에서 묘한 일이 발생한다.

3월17일 북한과 중국의 접경에서 취재중이던 미국 국적의 여기자 2명이 취재도중 북한군에 억류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미국과의 대결 국면 속에서 북한은 이 카드를 적절히 사용했다.

6월8일 북한 중앙재판소는 미 여기자 2명에 '조선민족적대죄' 등을 적용해 12년 노동교화형을 선고한다.

결국 8월4일 빌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이 여기자 석방교섭을 위해 방북했고, 김정일 위원장과의 면담을 가졌고 여기자들과 다음날 '화려하게' 귀환했다.

여기자 석방 한달여 전부터 북한은 갑작스럽게 평화공세를 펼쳤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성사시킨 북한은 이후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도 평양으로 불러들여 그녀가 요구하는 사항을 수용했다.

나아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때에는 김기남 노동중 중앙위원회 비서와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라는 김정일 위원장의 핵심측근을 조문사절로 서울에 보내 이명박 대통령을 예방하도록했다.

이어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의 북한 방문을 통해 여러 분야에서의 협력을 내용으로 하는 합의를 체결했으며, 이를 계기로 미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개선 의지를 표명하기에 이른다.

이후 북한은 뉴욕채널 등을 통해 보즈워스 특별대표의 평양행을 초청했고 이후 양측은 대화의 주체와 형식 등을 놓고 물밑 조율을 거듭했다.

특히 미국은 보즈워스 대표가 오바마 대통령의 특사 자격인 만큼 북한 외교를 실무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을 협상대표로 요구했고, 북미 대화의 성격도 '6자회담의 틀내'에서 성사되는 것임을 강조했다.

한마디로 북미 대화를 '대담한 거래'로 연결하려는 북한의 전술에 말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고수한 셈이다.

이는 곧 '협상은 6자회담에서'라는 말로 연결된다.

이 때문에 9월초께 성사될 것으로 여겨졌던 보즈워스 대표의 방북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미국과의 대화를 간절히 원한 북한은 미국의 요구 가운데 강석주 1부상의 협상참여 등을 수용했다는 후문이다.

다만 북미대화를 한번이 아닌 `몇차례' 진행하자는 요구를 강조했다고 외교소식통들은 전했다.

국내 여론의 압력으로 더이상 대화를 미룰 수 없는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측이 '일정한 양보'를 하자 결국 북미 대화를 선택했고, 이를 19일 한반도의 남쪽인 서울에서 공식 선언하게 된 것이다.

(서울연합뉴스) 이우탁 기자 lwt@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