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오전 9시 벨기에 브뤼셀 시내 중심가의 뤼 드 라 루아(법의 거리).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있는 '베를레이몽(Berlaymont)' 건물 앞에는 수백명의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11년째 EU를 출입하고 있는 이탈리아인 프리랜서 기자 마리아 라우라 프란초시씨는 "여기 오가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집행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찾아오는 로비스트"라고 말했다.

같은 날 정오 베를레이몽 프레스룸에서는 집행위의 심 칼라스 행정담당 부집행위원장이 기자들 앞에 나와 "지난 1년간 로비스트 등 이해관계자들이 집행위에 자발적으로 신고를 하도록 유도한 결과 2000여개 기관이 등록을 마쳤다"고 발표했다.

◆각종 의사결정에 영향력 지대

브뤼셀은 로비스트의 천국이나 다름없다. EU 집행위는 모든 의사결정 과정에서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듣는다는 명목으로 로비스트들과 긴밀하게 협조한다. '로빙펌(lobbying firm)'이라고 불리는 전문 로비스트 집단은 물론 대부분의 로펌들도 집행위에 영향력을 미치는 로비 행위가 주요 수입원이다.

로펌 반바엘앤드벨리스의 장 프랑수아 벨리스 대표는 "집행위 등록은 필수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 브뤼셀의 로빙펌과 로펌 등 로비기관들은 2000개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고 밝혔다. 집행위 관계자는 "비공식적으로 최소 1만5000명 이상의 로비스트가 활동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처럼 로비가 성행하는 이유는 EU의 27개 회원국별,또 산업과 기업별 이해관계가 워낙 달라서다.

로비스트들이 활동하는 방식은 한국과 유사하다. 평소 집행위 주요 관계자들을 만나 밥을 먹거나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게 우선이다. 집행위 내부 분위기와 의사결정 시점에 대한 정보 수집이 자연스레 이뤄진다. 한두 건이라도 좋은 정보를 물어오면 고객과 수임료가 늘어난다. 벨리스 대표는 "원활한 로비를 위해 집행위에서 일하다가 퇴직한 이들을 회사의 고문으로 영입하는 경우도 흔하다"며 "퇴직 후 1년간 유사업종에서 일할 수 없도록 하는 규정이 있지만 편법으로 피해가곤 한다"고 귀띔했다.

매일 정오에 열리는 기자회견에 참석하는 이들 중 상당수는 전문지 기자 등으로 가장한 로비스트들이다. 지난 15일 한 · EU 자유무역협정(FTA) 관련 기자회견에서 한 독일 전문지 기자는 캐서린 애슈턴 EU 통상교섭본부장에게 "한국 차업체들이 누리는 혜택을 EU 자동차업체들도 100% 똑같이 누릴 수 있는가"를 물었다. 집행위를 압박해 독일 차업계를 위한 공식 코멘트를 얻어내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했다.

로비스트들의 영향력은 아주 크다. 의제 설정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 거의 결정된 사안을 뒤집거나 일정을 연기하는 일은 다반사다. 브뤼셀 로펌 시들리에서 일하는 설정의 변호사는 "2005년 집행위가 몸에 해로운 니켈과 붕소를 규제하려 하자 화학업체들이 개입해 규제 시점을 2006년에서 2008년으로 미뤘다"며 "현재도 유럽자동차공업협회(ACEA)는 EU가 도입하려는 경차 탄소 배출 규제를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 로비 수준은 아직 미약

반면 한국은 EU의 주요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고사하고 알려진 정보조차 제대로 수집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브뤼셀 관계자들에 따르면 금호타이어는 EU가 지난 10월부터 발효한 새 타이어 소음 규제 기준을 알지 못해 이미 들어온 수백억원어치의 타이어를 유럽에 쌓아놓은 채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브뤼셀에 지부를 둔 한국 기업은 현대자동차 한 곳(유통 · 물류업체 제외)뿐이다.

미국계 로펌 윌머 헤일의 강성진 변호사는 "산업계 이해관계자로서 영향력을 미치려면 이슈가 맨 처음 설정될 때부터 개입해야 하는데 한국 업체들은 그다지 관심이 없다가 막판에 뒤늦게 발을 구르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박준우 주EU 대사는 "한국도 적극적으로 초기 단계부터 집행위 결정에 개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브뤼셀(벨기에)=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