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1 · 2차 오일쇼크,1998년 IMF 외환위기,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우리 경제의 근간을 흔들었던 위기의 순간들이다. 실제로 부도를 맞기도 했다. 이러한 위기의 순간마다 빛을 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글로벌 외교 · 금융에 정통한 관료들인 이른바 '국제금융통(通)'이 그들이다. 유창한 영어 실력과 풍부한 국제기구 경험,해박한 금융지식을 무기로 이들은 위기 탈출의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위기 때 빛났던 국제금융통

재무부 · 재정경제원 · 재정경제부 · 기획재정부로 이어지는 경제부처에서 국제금융통이라 할 수 있는 관료는 의외로 적다. 국내 금융회사를 쥐고 흔들었던 이재국과 금융정책국,나라살림의 근간을 세우는 예산실과 세제실에 상대적으로 인재가 몰린 탓이다. 하지만 국제통들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도 못하면서 외부에서 닥쳐오는 위기를 극복하는 해결사 역할을 해냈다.

최고참 국제금융통으로는 고(故) 정인용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꼽힌다. 재무부 외환국장,국제금융차관보,아시아개발은행(ADB) 부총재 등을 두루 거친 이력도 화려하지만 그를 국제금융통의 원조로 보는 이유는 따로 있다. 1974년 1차 오일쇼크 당시 재무무 외환국장이던 그는 미국 씨티은행과 체이스맨해튼 은행을 설득한 끝에 차관을 들여와 국가 부도 위기를 벗어나는 데 기여했다. 재정부 관계자는 "당시 국내 경제에만 치중하던 재무부에서 처음으로 국제금융의 중요성을 각인시킨 게 정 전 부총리였다"고 설명했다.

정 전 부총리의 뒤를 잇는 국제금융통으로는 이용성 전 은행감독원장을 들 수 있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무려 4년간 재무부 국제금융국장을 지냈다. 1985년 국내 최초의 국제 금융회의인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 국제통화기금(IMF) 총회를 유치한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재무부 국제금융국장,국제금융 담당 차관보,ADB 부총재를 지낸 신명호 한국HSBC 회장도 손꼽히는 국제금융통이다. 정덕구 니어(NEAR)재단 이사장(전 산업자원부 장관)도 넓은 의미에서 국제금융통으로 분류된다. 1994년 국제금융국장을 지낸 그는 외환위기가 터진 1997년 말 재정경제원 2차관보를 맡아 IMF와의 협상단을 이끌었다.

김용덕 전 금융감독위원장(행시 15회)도 빼놓을 수 없다. 사무관 시절부터 국제금융국에 몸담은 그는 2001년 재정경제부 국제업무정책관(차관보급) 시절 중국과 일본을 설득해 한 · 중 · 일 국제금융국장 회의를 상설화하는 일을 주도했다. 이 회의는 나중에 아세안+3(한 · 중 · 일) 정상회의로 발전했고 동아시아 역내 금융 공조체제인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로 가는 계기가 됐다.

◆지난해 위기 속에서도 큰 역할 해내

현 경제관료 중에서는 권태신 국무총리실장(행시 19회)이 대표적 국제금융통으로 꼽힌다. 권 실장은 2002년 국제금융국장 시절 국제금융정책관이었던 김용덕 차관보와 함께 외환위기 이후 추락했던 우리나라의 국제신용등급(무디스)을 4년여 만에 'A' 등급으로 회복시킨 주역이다. 당시 진념 경제부총리를 수행해 미국 무디스 본사를 방문한 자리에서 "우리와 비슷한 수준의 경쟁국들은 'A' 등급인데 왜 한국만 'Baa' 수준이냐"며 등급 상향 조정의 당위성을 따져 물었던 일은 아직도 관가에서 회자된다. 재정부에서는 허경욱 재정부 1차관(행시 22회)이 국제금융통의 계보를 잇고 있다. 재무부와 재경원,재정경제부 등에서 국제금융 업무만을 담당한 그는 1997 · 1998년 외환위기 당시 정덕구 재경부 차관보를 도와 IMF 협상 실무를 맡았다. 2001년 IMF의 시니어 이코노미스트(Senior Economist)로 3년간 근무하고 2006년 국제금융국장을 맡으면서 '국제신사'라는 닉네임을 얻을 정도로 탄탄한 해외 인맥을 갖춘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신제윤 차관보(행시 24회)는 지난해 10월 강만수 전 재정부 장관, 이광주 한국은행 부총재보와 함께 한 · 미 통화스와프를 성사시킨 일등공신.미국과의 통화스와프 체결은 당시 글로벌 금융위기로 단기외채가 급증하면서 불거졌던 외화유동성 우려를 일거에 해소하면서 혼란을 빚던 국내 금융시장을 안정시켰다. 그는 사공일 G20기획조정위원장(무역협회장),안호영 외교통상부 통상교섭조정관과 호흡을 맞춰 내년 G20 정상회의를 유치하는 성과도 일궈냈다. 최종구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추진단장(행시 25회)도 국제금융통으로 통한다. 지난해 재정부 국제금융국장을 맡아 일본 및 중국과의 통화스와프 규모를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전문성 갖춘 국제통 육성해야

G20 정상회의로 주가가 치솟긴 했지만 현실적으로 국제금융통은 별로 없다. 그러다보니 매번 글로벌 위기를 맞을 때마다 국제금융에 해박한 몇몇 관료들의 개인 역량에만 의존하는 관행이 되풀이된다. 이에 대해 재정부 고위 관계자는 "지금은 국제금융에 대한 선호도가 높지만 여전히 '국제금융국은 노는 곳'이란 인식이 많다"며 "전문화된 관료를 키울 수 있는 인사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용덕 전 금감위원장은 "평시에 국내 금융만 중시되는 풍토가 없어져야 한다"며 "선진국으로 가면 갈수록 경제정책이 상당 부분 국가 간 조율을 거칠 수밖에 없어 국제금융 분야 전문성을 더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사공일 무역협회장은 "글로벌 인재가 되려면 세계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꿰고 있어야 하고 언제든지 전화로 유력 인사들과 현안을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며 '콘텐츠'와 '언어'를 동시에 갖추는 게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태명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