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건국 이후 60년간 수많은 고비를 지나왔다. 1958년 시작한 대약진(大躍進)운동은 사유제를 급격히 퇴조시킨 국가 주도의 경제부흥 운동이다. 중 · 소 분쟁으로 고립된 마오쩌둥이 자력갱생 노선으로 돌아서면서 택한 카드였다. 하지만 농촌에 넘쳐나는 풍부한 노동력은 도시로의 이주 제한으로 활용되지 못했고,'15년 내 철강 생산에서 영국을 따라잡자'는 구호 아래 주민들은 가정에 있는 쇠붙이 조각까지 철강 공장에 바치는 비효율적인 행태가 이어졌다. 시장의 자원 배분 기능이 철저히 무시된 것이다. 가뭄까지 겹쳐 2000만명 이상이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대약진운동 실패의 책임을 지고 2선으로 퇴진한 마오쩌둥은 복권을 위해 1966년 문화대혁명(문혁)이라는 카드를 꺼낸다. 반혁명 수정주의를 몰아내자며 10년 동안 홍위병을 내세워 벌인 대규모 군중운동이다. 마오쩌둥은 당권을 다시 장악했지만 홍위병의 준동으로 중국 내 모든 학교와 공장이 문을 닫고 대륙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도시민 1200만명이 '하방(下放)'을 통해 농촌으로 내려갔고,4000만명으로 추산되는 인사들이 주자파(走資派)로 몰려 감옥에서, 때로는 거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경제가 피폐해지고 개혁피로증이 전국을 휩쓸면서 주자파로 실각했던 덩샤오핑이 복권했고 문혁을 주도한 4인방 세력은 위협을 받는다. 마오쩌둥이 1976년 9월 세상을 떠나면서 정세는 급변했다. 4인방의 횡포를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군부가 덩샤오핑과 손잡고 10월 4인방을 전격 체포하면서 문혁은 막을 내렸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이 후계자로 지명했던 화궈펑 총서기를 당내 투쟁을 통해 제치고 1인자가 됐다. 덩샤오핑은 1978년 계급투쟁의 구호를 내리고 개혁 · 개방의 기치를 내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라면 용인될 수 없는 불평등 · 불균형 발전도 용인됐다. '먼저 부자가 되어도 좋다(先富起來)!'는 것이다. 자본주의 초기실험은 잘나가는 듯했지만 경기 과열에 따른 심각한 인플레이션과 부패 그리고 민주화 요구가 섞이면서 1989년 톈안먼사태로 고비를 맞는다. 외국 기업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극좌파들이 득세하자 덩샤오핑은 1992년 1월 남순강화(南巡講話) 카드를 꺼낸다. 선전 등 남부지방의 경제특구를 둘러보면서 "개혁 · 개방을 하지 않고,경제를 발전시키지 않으면 오직 죽음으로 가는 길뿐이다. 이런 기본 노선은 100년 동안 흔들림 없이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해 공산당은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 확립을 국정 방향으로 결정하고,경제는 다시 성장 탄력을 받는다.

1999년엔 탄압받던 파룬궁 신도 1만여명이 중국 지도부의 거주지와 집무실이 모여 있는 중난하이를 에워싸는 사태가 발생한다. 신도들이 인터넷으로 연락을 주고받은 것으로 확인되면서 중국의 인터넷 통제가 본격화하는 계기가 됐다.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은 중국이 세계 공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했다. 2002년 공산당 당장(黨章)에 삽입한 3개 대표이론(당이 선진생산력,선진문화,광대한 중국인민의 근본이익을 대표)은 노동자계급 선봉대인 공산당을 국민정당으로 변모시켰다.

경제에 공짜 점심은 없다. 에너지 부족,도농 간 빈부격차,부정부패,환경오염 문제가 사회 불만으로 터져나오자 2003년 3월 국가주석에 취임한 후진타오는 과학 발전과 조화사회라는 새 정책 방향을 제시했다.

하지만 지난해 베이징올림픽 직후 세계경제를 덮친 미국발 금융위기로 중국은 또 다른 변곡점에 서 있다. 60년 공산당 일당 체제에 안전판을 제공한 고성장 시대가 저물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지도부의 카드가 주목된다.

오광진 기자 kj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