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정상들 '의지' 결집..간극은 여전
코펜하겐 협상 성공 "아직 갈 길 멀어"


사상 최대 규모의 기후변화 정상회의가 `절반 이상의 성공'으로 막을 내렸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주재로 22일(현지시간) 열린 회의에서 정상들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 오는 12월 코펜하겐에서 열리는 회의에서 기후변화 협정 타결이 긴급하고 중대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면서 `정치적 의지'를 과시했다.

그러나 책임 있는 국가들의 구체적 실천 프로그램이 나오지 않아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 회의를 기획.소집하고 직접 주재까지 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세계 최고지도자들의 정치적 의지를 확인했고, 코펜하겐 회의의 성공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밝혔지만, 앞으로 86일 남은 코펜하겐 회의에서 각국이 밀접한 이해가 걸려 있는 기후변화 협상에 최종 합의할지는 아직도 불투명하다.

다만, 이번 회의를 통해 유럽과 일본의 적극적인 입장이 개진되고, 중국 후진타오 국가주석의 `현저한 폭' 감소 언급 등으로 인해 실무 협상이 탄력을 받게 된다면 협상 타결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는 게 유엔 주변의 평가다.

◇ 정상들 한목소리 = 회의를 시작하면서 반 총장은 "올해 새로운 기후변화 협약 타결에 실패한다면 이는 도덕적으로 용서받지 못할 것이며 경제적으로는 근시안적 처사이고, 정치적으로도 현명치 못한 행위"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북극 방문 경험을 언급하면서 "세계의 빙하가 녹는 속도는 인간이 막으려는 것보다 훨씬 빠르다"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양보를 받으려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어떻게 더 큰 선을 위해 기여할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며 선진국과 개도국들의 자발적 양보를 촉구했다.

그는 "미래 세대의 운명과 수십억 지구 인구의 삶과 희망이 오늘 여러분에게 달렸다"고 강조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인간이 만든 문제는 인간이 해결해야 한다"는 존 F 케네디의 말을 인용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인류는 기후변화의 위협에 느긋하게 대처해 왔고, 솔직히 미국도 그랬다.

지금 우리의 안전과 안정, 번영은 위협받고 있으며, 이 흐름을 되돌려 놓아야할 시간은 소진돼 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후진타오 총리 역시 "2005년 대비 2020년까지 `현저한 폭'으로 이탄화탄소 배출량을 감축시킬 것"이며, 산림의 규모를 증대시키고, 원자력 또는 비화석연료의 사용을 2020년까지 15%로 증가시킬 것이라며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도 아울러 밝혔다.

유엔의 한 외교관은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이같이 말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일본의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신임 총리의 발언은 유엔의 주목을 받았다.

세계 온실가스 방출량의 4%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일본은 그동안 자민당 정권하에서 기후변화 협약에 소극적이었지만, 하토야마 총리는 1990년 대비 2020년까지 25%의 감축 목표치를 제시해, 현재 유럽연합의 20%나 미국의 17%에 비해 훨씬 더 진전된 안을 제시했다.

그는 또 개도국들이 주장하는 돈과 기술의 이전에 대해서도 "일본은 빈국들의 온실가스 방출 감축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과 기술 지원을 할 준비가 돼 있다"며 적극적 의지를 피력했다.

니콜라 사르코치 프랑스 대통령은 11월에 온실가스 배출에 책임 있는 국가의 정상들이 다시 만나 코펜하겐 성공을 위한 구체적인 약속을 하자고 촉구했고, 영국의 고든 브라운 총리는 개도국 지원을 위한 기금 조성을 제안했다.

◇ 좁혀지지 않은 간극 = 이날 정상회의를 지켜본 한 유엔 외교관은 "개도국과 선진국이 서로 다른 잣대로 상황을 재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구의 위기에 대한 인식의 공감대와 각국이 처한 현실의 괴리가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미국의 에너지 이산화탄소 정보분석센터의 자료에 따르면 미국과 중국은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에서 거의 비슷한 각각 20%씩을 차지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14%를 차지한다.

그러나 단위 국내총생산(GDP) 규모로 따질 경우 중국의 책임은 훨씬 덜 하며 1인당 배출량으로 따지면 중국이나 인도 등은 오히려 배출의 여지가 많은 국가라는 입장이다.

오히려 산업화 이후 선진국들이 내뿜어온 이산화탄소가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라며 역사적 책임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날 회의에서도 오바마 대통령은 "개도국들의 강도 높은 배출 감축 조치"를 촉구한 반면, 후진타오 주석은 "낮은 수준의 기술과 자본의 부족은 개발도상국가들이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수단과 가능성을 제한하고 있다"면서 "개도국들은 경제성장.사회발전, 그리고 환경보호 사이에서 균형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실무 협상과정에서 가장 첨예하고 맞서고 있는 양국의 지도자들은 이날 새로운 제안이나 구체적인 감축 목표치를 제시하지 않았다.

강도는 낮았지만, 기존의 주장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 코펜하겐 협상 전망 = 반 총장을 비롯한 유엔 측은 이번 정상회의가 교착상태에 빠져있는 협상에 중대한 모멘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환경부 국제협력관을 지낸 유엔주재 한국대표부의 신부남 차석대사는 "이번 회의는 협상을 위한 장(場)도 아니고, 어떤 합의를 보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면서 "구체적 액션 프로그램이 나오리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없었으며, 이 정도의 정치적 의지가 결집된 것도 기대 이상"이라고 평가했다.

오히려 이번 회의를 통해 일본과 유럽 각국의 적극적인 미.중 중재 노력으로 코펜하겐 협상에 탄력이 붙게 될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특히 개도국 지원을 위한 구체적인 기금.기구 등의 창설 움직임이 이 회의를 전후해 제기되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유엔 측은 연간 2천500억달러의 자금이 개도국 지원에 필요하다고 보고 있고, 당장 일부 국가들은 1천억달러의 기금을 창설하자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피츠버그 G20 정상회의에서 더 구체적으로 논의될 것이라고 유엔 관계자는 전했다.

하지만 중국 측이 온실가스 감축 노력이라는 큰 원칙에는 동의하면서도 1인당 배출량 또는 GDP 증가 속도와 배출량 증가 속도의 편차 등을 주장하며 선진국 책임론을 계속 주장하고 있는데다, 미국도 온실가스 감축 목표관련 법안이 하원은 통과했지만 상원 통과라는 힘겨운 과정을 남겨 놓고 있어 코펜하겐으로 가는 길은 아직도 순탄치만은 않다.

더욱이 정치 지도자들이 국제정치 무대에서 한 외교적 언급이 각국의 첨예한 이해가 얽혀 있는 실제 협상의 장에서 그대로 먹혀들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반 총장이 회의 말미에 "아직 갈 길이 멀다.

이 정치적 모멘텀을 코펜하겐까지 이어가 달라"고 당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유엔본부연합뉴스) 김현재 특파원 kn0209@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