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가용한 카드 다 동원..美 제재 불변
핵군축 회담 명분 축적 의도도 엿보여


핵 문제를 둘러싸고 북한과 미국이 벌이는 기싸움이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북한은 3일 신선호 유엔주재 자국대표 명의로 유엔 안보리 의장에게 전달한 편지를 통해 '우라늄농축 시험 성공'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내밀었고 미국은 '선(先)비핵화 원칙'을 고수하며 북한에 대한 제재를 계속해나갈 것임을 분명히했다.

북한의 이날 '도발'은 특히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과 미국 여기자의 석방으로 이어지는 화려한 평화 공세 속에서 나온 것으로, 미국을 향해 '대결이냐, 협상이냐'의 선택을 강요하는 전형적인 벼랑끝 전술로 풀이되고 있다.

어찌 보면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상대로 치킨게임(한쪽이 질 때까지 끝장을 보는 게임)을 해보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으로도 읽힌다.

실제로 우라늄 농축의 성공을 과시하는 것은 물론 폐연료봉 재처리를 통한 추가 플루토늄 확보와 무기화, 나아가 '또 다른 자위적인 강경대응 조치들'을 취할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사실상 모든 카드를 다 동원했다.

우라늄농축을 통한 핵무기 프로그램은 은닉하기 쉬울 뿐 아니라 일단 고농축우라늄(HEU)을 확보할 경우 핵이전의 용이성 등으로 미국으로서는 치명적인 카드가 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또 8천여개의 폐연료봉을 재처리해 최대 8kg의 플루토늄을 추출할 경우 핵무기 1개 정도를 만들 수 있는 양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된다.

그동안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플루토늄의 양은 핵무기 6∼8개를 제조할 수 있는 40kg 안팎으로 추정돼왔다.

특히 북한은 미국을 향해 '또 다른 자위적인 강경대응 조치'도 비축해놓고 있음을 강조했다.

편지에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는 지난 4월 북한 외무성 대변인이 '자위적 조치'로 핵실험과 함께 언급한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발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ICBM 카드는 북한이 미국을 상대로 구사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ICBM에 소형화된 핵탄두를 장착하면 미국 본토도 핵무기에서 안전하지 않을 것임을 과시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높이겠다는 것이다.

 
북한은 이처럼 미국을 향한 화려한 도발카드를 나열했지만 또 다른 메시지 역시 굳이 숨기지 않았다.

편지의 내용 가운데 "우리는 우리 공화국의 자주권과 평화적 발전권을 난폭하게 유린하는 데 이용된 6자회담 구도를 반대한 것이지 조선반도 비핵화와 세계의 비핵화 그 자체를 부정한 적은 없다"며 "조선반도의 비핵화는 철두철미 미국의 대조선 핵정책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한 것이 그것이다.

즉 미국이 북한의 '자주권과 평화적 발전권'을 보장한다면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 복귀가 가능하며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폐기를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면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결단'도 가능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의도는 단순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미국으로 하여금 현재의 제재국면을 다시 생각하고 북한을 대화상대로 인정하며 '진정한 협상'을 해보자는 미끼를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 외교소식통은 "최근 미국은 북한과의 대화 재개 문제와 관련, '6자회담의 복귀선언'을 북측에 강력히 촉구하면서 비가역적 비핵화 조치가 있기 전에는 대북 제재 완화 문제를 논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북측에 전한 것으로 안다"면서 "따라서 북측 편지의 내용은 이런 미국의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미국과 다른 관련국들이 과거 1차 핵실험 당시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가 유명무실해진 것과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상황에서 북한은 '해볼 테면 해보자'는 전술을 다시 구사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나아가 '조선반도 비핵화와 세계의 비핵화'를 강조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핵보유국간 '핵군축'쪽으로 국면을 끌고 가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이제 관심은 미국의 선택에 쏠리고 있다.

현재 스티븐 보즈워스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동북아 순방 중이다.

특히 4일에는 한국을 방문해 북한을 상대로 한 향후 대응책 등을 중점 협의한다.

정부 당국자들은 미국의 향후 행보에 대해 "북한의 의도가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미 15년이 넘는 세월을 북한과 협상해온 만큼 북한의 전술에 말리지 않으면서 차분하면서도 원칙을 고수하는 대응이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정부의 고위당국자는 이날 북한의 도발적인 편지내용에 언급, "좋지 않은 행보"라고 평가한 뒤 "북한이 비핵화에 역행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며 "유엔의 대북 제재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특히 북한이 지향하는 '핵보유국 지위'를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을 당국자들은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내에서도 다른 미묘한 기류가 일고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외교 분야에서 뚜렷한 실적이 없는 오바마 정부를 향해 미국내 일부 세력들이 대선주자 시절부터 강조해온 '적대국과의 과감한 협상'을 왜 실천하지 않으려 하느냐는 비판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미국내에서는 어차피 제재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북한과 대화를 하기 위한 전제조건을 제시하는 것이 과연 유용한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미국 정부는 주요 관련국과의 협의는 물론 미국내 여론의 추이를 보면서 북한에 대한 대응방향을 결정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과정에서 북한의 미국을 향한 '심리전'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또 북한과 미국 외에도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 그리고 한국과 일본 등의 개입이 본격화되면서 북핵 외교가는 복잡한 방정식을 풀기 위한 각국의 치열한 수 읽기로 더욱 뜨거워질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연합뉴스) 이우탁 기자 lwt@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