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8 · 30 총선은 반세기 만의 정권 교체를 이룬 역사적인 사건이었던 만큼 '볼 만한 승부'도 많았다. 대표적인 게 여권 거물들과 민주당 '미녀 자객'들의 대결.민주당의 선거전략을 총지휘한 오자와 이치로 대표대행은 20~40대 미모의 여성들을 발굴해 공동 여당인 자민당과 공명당의 거물 지역구에 집중 투입했다. 그래서 이들은 '오자와 걸(girl)'로도 불린다.

오자와의 '미녀 자객' 군단은 낮은 지명도와 조직 열세에도 불구하고 여권 거물들을 꺾는 임무를 완수했다.

그 중에서도 공동 여당인 공명당 대표를 무너뜨린 미모의 참의원 의원,전 방위상을 누른 28세 처녀,자민당의 자객 출신을 쓰러뜨린 여교수 등은 '대중 스타' 급으로 부상했다.

◆나가사키2구 후쿠다 에리코 당선자(28)


민주당 신진인 후쿠다 당선자는 선거 초반부터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방위상을 지낸 자민당 거물 규마 후미오 전 의원(68 · 9선)을 떨어뜨리겠다고 막내딸뻘의 20대 처녀가 나섰기 때문이다.

후쿠다 당선자는 투여받은 혈액 제제로 인해 간염에 걸린 피해자들이 정부를 상대로 벌인 소송의 시민원고단 대표 중 한 명이었다. 지난해 9월 소송에서 이기고 나선 기자회견에서 "결혼해서 평범한 주부가 되고 싶다"고 장래 희망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작년 말 오자와 당시 민주당 대표의 전화 한 통을 받고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 "차기 총선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달라"는 권유를 얼떨결에 받아들인 것.'아저씨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정치에 뛰어든 그는 처음엔 얼굴도 모르는 유권자들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러나 "사람 손의 따스함을 느끼며 인명을 경시하는 정치는 이제 끝내야 한다는 의지가 샘솟았다"고 한다. 상대인 규마 전 방위상은 2007년 "일본에 대한 미국의 원폭은 어쩔 수 없었다"는 발언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터였다.

후쿠다 당선자는 오자와 대표대행의 지시로 경자동차를 타고 뒷골목을 누비고,수백명밖에 안 사는 섬들도 세 번씩 돌았다. 구석구석 발로 뛰는 선거운동으로 결국 당선된 그는 31일 지지자들 앞에서 "역사가 바뀌었다. 일본은 바뀐다"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도쿄12구 아오키 아이 당선자(44)


민주당 참의원 의원 출신인 아오키 당선자는 이번 선거에서 엄청난 전공을 세운 미녀 자객이다. 상대는 공동 여당인 공명당의 오타 아키히로 대표(63 · 5선)였다. 오타 대표가 이번 선거에서 떨어질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타 대표는 당선을 자신하고,'안전판'인 비례대표에 중복 출마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오키 후보는 오타 대표의 무릎을 꿇게 했고,결국 그를 당 대표에서 물러나게까지 만들었다.

TV리포터 출신인 아오키 당선자는 2005년 중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뒤 약 2년간 오자와 대표대행의 사설 비서를 지냈다. 전형적인 '오자와 칠드런(Children)'인 셈이다. 그는 2007년 참의원 선거에 당선돼 임기가 4년이나 더 남아 있다.

하지만 지난 7월 말 오자와 대표대행으로부터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질 생각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무조건 출마를 결정했다. 오자와 대표대행은 아오키 당선자의 선거사무소에 자신의 비서 2명을 파견해 선거운동을 전폭 지원하는 등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도쿄10구 에바타 다카코 당선자(49)

민주당 신진인 에바타 당선자는 자민당의 고이케 유리코 전 방위상(57 · 5선)을 쓰러뜨렸다. 고이케 전 방위상은 2005년 우정민영화 선거 때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가 정적을 떨어뜨리기 위해 전략적으로 투입한 '자객 1호'였다. 자객 출신으로 지난해 자민당 총재 선거에도 출마했던 거물인 고이케는 처음엔 민주당의 '역자객'을 우습게 봤다.

에바타 당선자는 도쿄대 특임교수 등 경력은 화려했지만,2007년 12월 공천을 받을 땐 민주당 지지자들로부터도 '역부족'이란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에바타 당선자는 지난 1년간 매일 아침 지역구의 전철역에 나가 출근하는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이렇게 돌린 명함만 10만장이 넘는다. 에바타 당선자에게 패배한 고이케 전 방위상은 결국 중복 출마한 비례대표로 겨우 의원 배지를 유지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처럼 '미녀 자객'들의 대거 당선으로 민주당의 여성 의원 수는 종전의 7명에서 무려 5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고이즈미 아들은 세습 성공

이번 총선의 특징 중 하나는 자민당의 세습 정치인들이 민주당 바람에 상당수 날아갔다는 것이다. 세습 당선자는 자민당과 민주당을 합쳐 87명.당초 170여명이 출마했지만 절반 정도만 살아남았다.

세습 후보의 몰락 와중에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67)의 아들은 세습 당선에 성공해 눈길을 끈다. 고이즈미 전 총리의 차남인 고이즈미 신지로(28)는 아버지의 지역구인 가나가와에서 출마해 민주당의 신진 후보를 따돌리고 당선됐다. 당초 여론조사에선 '고이즈미 개혁'에 대한 민심 이반과 민주당의 돌풍으로 고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아들에게 지역구를 물려주고 정계 은퇴를 선언한 아버지 고이즈미 전 총리가 전폭적인 선거 지원에 나선 게 큰 힘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고이즈미 가문은 100여년에 걸친 4대째 의원 세습을 잇게 됐다.

한편 가이후 도시키 전 총리(78) 등 60대 이상 자민당 거물들이 줄줄이 고배를 마신 가운데 모리 요시로,후쿠다 야스오,아베 신조 전 총리는 턱걸이 당선으로 체면을 지켰다. 자민당과 연립정권을 구성했던 공명당은 21석 확보에 그치면서 수장까지 잃었다.

도쿄=차병석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