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업 '리걸 트랩' 비상] (1) 음모·배신 판치는 '담합의 덫'

"처음부터 담합을 목적으로 경쟁 업체들과 접촉한 것은 아니었어요. 정보에 목말라 미국 시장에 진출한 아시아 액정표시장치(LCD) 업계 친목 모임에 열심히 참여했던 것뿐이죠."

한 LCD 업계 고위관계자에게 '미국 법무부 4억달러 담합 과징금 사건'이 시작됐던 2001년 얘기를 묻자 이 같은 답이 돌아왔다. 그는 "1999년 만들어져 2년 된 회사가 처음 미국에 진출하다 보니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제한적이었다"며 "경쟁 업체 관계자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으면 시장 동향을 보고하라는 본사의 지시를 따를 수 없었던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LCD 업계 모임은 점점 업종별 협회와 엇비슷한 성격을 띠게 됐다. "우리끼리 싸워서 득될 게 있느냐"는 의견을 내놓는 업체도 늘어났다. 이 관계자는 "가격을 무리하게 낮추는 등 튀는 행동을 하면 미국 LCD 업계에서 '왕따'를 당하는 상황이 빚어지면서 부지불식간에 담합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고 말했다.


◆담합의 덫

미국 법무부는 지난해 11월 LG디스플레이와 일본 샤프,대만 CPT 등에 각각 4억달러,1억2000만달러,6500만달러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아시아 LCD 업체들의 담합으로 애플 델 모토로라 등 미국 업체와 소비자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게 당시 미 법무부의 설명이었다. LG디스플레이가 당한 수모는 과징금만이 아니었다. 미국 법인을 담당했던 임원 2명이 담합 혐의로 구속돼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 나란히 적발된 CPT도 4명에 달하는 임원이 영어의 몸이 됐다.

담합 사건에 연루됐던 LCD 업체 관계자는 "미 법무부가 과징금 서류에 사인하라고 했을 때 도저히 반발할 수가 없었다"며 "미국 정부에 찍히는 것도 무서웠고 구속되는 직원의 안위도 생각해야 했다"고 말했다. 항공업계 관계자도 2007년 대한항공 화물기 운임 담합 사건과 관련,"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으면 과징금이 최대 3배까지 불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배신자를 찾아라

미국 법무부를 비롯한 각국 정부는 먼저 자백하는 기업에는 죄를 묻지 않겠다고 선언,카르텔 내부의 고발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담합 등의 불공정거래를 적발하는 '리니언시(leniency:관대한 처분)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게임이론 중 하나인 '죄수의 딜레마'를 활용한 것이다.

범죄 용의자 A,B가 경찰에서 격리된 채 자백을 요구받는다. 물증이 없기 때문에 A,B 모두 자백하지 않으면 무죄다. 경찰은 A와 B에게 "네가 자백하지 않았는데 상대방이 자백하면 형량은 10년이 된다"고 협박한다. 자백을 않는 게 가장 합리적이지만,경쟁 관계에 있는 상대방을 믿지 못해 자백을 선택하게 된다.

담합으로 가장 큰 이익을 얻은 업체가 죄수의 딜레마를 활용해 면죄부를 받고 있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리니언시 제도가 유지되는 이유는 물증 확보 때문이다. 정황 증거만으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비율의 가격 인상이 이뤄지는 것은 비즈니스 세계에서 당연한 일"이라는 논리를 내세우는 기업들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불공정거래를 한 기업을 효율적으로 잡아내기 위한 목적도 있다.

D램 가격 담합 혐의로 과징금을 받았던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미국처럼 담합 과징금이 큰 나라에서 사업을 하는 기업들은 '죄수의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며 "2005년 D램 담합조사건도 미 법무부의 눈치를 읽은 해외 기업이 먼저 실토하는 바람에 빚어졌다"고 말했다.


◆공정경제의 음모

"미국이 '공정경제'라는 명목으로 아시아 LCD 기업들을 압박하고 있다. " 지난해 11월 미국 법무부가 한국과 일본 대만 LCD 업체에 5억8500만달러의 '과징금 폭탄'을 부과한 것과 관련,대만 언론들이 보인 격한 반응이다. 미국 기업이 LCD 업계를 장악하고 있었다면 대규모 과징금 부과는 없었을 것이라는 게 대만 언론들의 주장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자국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관세장벽을 쌓을 경우 국제기구의 제재를 피하기 힘들고 다른 나라로부터 보복을 당할 가능성도 크다"며 "최근에는 담합이나 불공정거래에 대한 강도 높은 규제를 통해 자국 산업을 보호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자국 기업이 제재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사건들이 대개 과징금의 규모가 큰 것이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덧붙였다.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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