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의왕시 고천동에 있는 시몬느 본사.울창한 숲,분수대와 산책로 사이에 널찍한 3층짜리 건물이 들어서 있다. 얼핏 보기에는 고급 휴양지나 대형 갤러리 같다. 내부도 마찬가지다. 중국 터키 이집트 등에서 만들어진 가구와 한국의 민화 등 400여점이 곳곳에 배치돼 있다. 시몬느라는 간판만 없으면 사옥이라는 생각을 못할 정도다.

2층 전시실 사방에는 세계 명품 핸드백 500여개로 가득차 있다. 한쪽은 미국의 코치,다른 한쪽은 영국의 버버리 핸드백 전시장이다. 나머지도 마이클 코어스,마크 제이콥스 등 여성들이 이름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30여 가지 명품들로 가득하다. 이 명품 핸드백은 모두 시몬느에서 디자인하고 생산한 것들이다. 시몬느는 코치 핸드백의 100%,나머지 명품의 45%를 ODM(제조자 개발생산) 방식으로 만들고 있다. 이 부문 세계 시장 점유율 1위인 명실상부한 히든 챔피언이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갔다

박은관 회장(54)이 시몬느를 세운 것은 1987년.처음부터 해외 명품 업체들을 겨냥했다. 국내 시장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믿은 것은 대학졸업 후 8년간 핸드백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전문 중소기업에서 근무했던 경험이 전부였다. 하지만 꿈은 야무졌다. 마진이 10% 미만인 OEM보다 이익을 두 배 이상 남길 수 있는 ODM으로 승부를 걸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시만 해도 기획 및 디자인을 모두 책임지는 ODM 방식은 생소했다. 아시아에서는 첫 도입인 만큼 성공 가능성도 낮아 보였다. 더욱이 당시는 국내 의류 및 핸드백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었다는 분석이 나오던 시기.박 회장의 도전은 무모해 보였다.

그가 처음 문을 두드린 곳은 전 회사의 거래처였던 미국 명품업체 도나 카란.이름도 생소하고 성과도 없는 회사가 주문을 따내기는 애당초 힘들었다. 그렇지만 박 회장은 끈질겼다. 임금이 너무 올라 해외 생산자를 찾고 있던 도나 카란의 구미에 맞춰 직접 생산비의 40% 수준에다 납기도 5분의 1로 단축하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도나 카란은 시험 삼아 핸드백 100개 주문을 냈다. 박 회장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전 직장에서 뛰어난 솜씨를 지닌 기술자들을 데리고 나온 것은 물론 서울시내 유명 수제 구두나 가방 공방 장인들을 포장마차에서 소주 사줘가며 영입해 때가 오기만을 벼르고 있던 차였다. 시몬느의 뛰어난 품질에 입이 딱 벌어진 도나 카란은 그 뒤 주문을 쏟아냈다. 입소문은 순식간에 명품 업체들에 돌아 내로라하는 명품 업체들이 차례로 시몬느를 찾았다.

첫해 400만달러였던 매출은 지속적으로 늘어나 작년엔 2억9781만달러(약 3850억원)로 불어났다. 아시아에서는 아무도 가지 않은 ODM이란 길을,그것도 애초부터 세계 시장을 겨냥해 이룩해낸 소중한 성과다.

◆회장님은 해외출장 중

박 회장은 "전 세계가 사업장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에 따라 회사는 철저한 글로벌 분업화를 구축했다. 디자인 개발과 샘플 제작은 한국에서 담당한다. 유럽 남미 등에서는 가죽 천 등 소재를 들여온다. 생산은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5개 해외 공장(종업원 1만5000여명)에서 이뤄진다. 이렇게 해서 만든 제품은 해외 명품 브랜드를 달고 세계 시장으로 퍼져 나간다.

박 회장의 집무실은 전 세계다. 비행기가 되기도 하고,호텔방이 되기도 한다. 1년 중 약 5~6개월을 해외에서 보낼 만큼 출장이 잦다. 22년 동안 쌓인 항공마일리지가 260만마일에 달할 정도다. "22년간 뉴욕에는 220차례 다녀왔고,기내에서 보낸 시간만 5년가량"이라고 박 회장은 설명했다.

그가 외국을 자주 찾는 이유는 공장을 관리하고 바이어를 만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현지 트렌드를 체감하고 글로벌 감각을 키우기 위해서 백화점이나 거리를 돌아다닌다. "기획,디자인,생산까지 책임져야 하는 만큼 바이어와 소비자의 눈높이를 못 맞추면 치열한 경쟁에서 도태하기 때문"이라는 것.비단 박 회장뿐만 아니다. 시몬느 본사에서 일하는 디자이너 및 영업 관리 생산 직원들도 1년에 평균 다섯 차례는 해외출장을 나간다.

글로벌 소비자의 구미를 당겨라

명품 가방의 핵심은 디자인이다. 그런 만큼 디자이너가 중요하다. 세계 주요 명품 핸드백을 디자인하는 시몬느의 디자이너는 80명.본사 직원 220여명 중 약 36%가 디자이너다. 지금까지 시몬느가 개발한 핸드백 디자인만 1만4000여개에 달한다.

주목할 점은 시몬느의 디자이너 모두가 한국인이고,한국에서 일한다는 점이다. 시몬느는 해외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하지만 디자인만큼은 한국에서 하는 것을 고집한다. 박 회장은 "글로벌 기업으로 알려진 국내 ODM 섬유회사들도 비용절감을 위해 동남아 현지 공장에서 디자인과 생산을 같이하고 있다"며 "이러면 노하우가 유출돼 후발국가에 따라잡힌다"고 국내 디자인을 고집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시몬느의 최고 자산은 각 분야별로 10년 이상 경력을 지닌 전문가들로 이뤄진 직원"이라며 "그들의 경력을 합치면 2700년이 넘고 이것이 우리 회사 경쟁력의 원천"이라고 강조했다.

디자이너를 위해 회사가 투자하는 돈은 연간 100억원이 넘는다. 고급 휴양시설이나 대형 갤러리 같은 사옥(2003년 대한민국 건축대상 수상)을 지은 것도 디자이너들의 창의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층마다 있는 야외 정원이나 호텔 로비 같은 휴식공간을 활용하면서 마음껏 '끼'를 발휘하라는 취지다. 박 회장은 "비록 연극이나 공연에서 배우를 돋보이게 하는 스태프와 같은 역할을 하지만 우리가 없으면 전 세계 명품 핸드백도 없다"고 자부했다.

의왕(경기)=임기훈 기자 shagg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