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이란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둔 지난 11일 수도 테헤란에선 밤 늦도록 축제가 열렸다. 개혁파 후보 미르 호세인 무사비를 상징하는 녹색 히잡을 머리에 두르고 10㎝의 아찔한 하이힐을 신은 젊은 여성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페르시안 힙합을 틀어놓고 춤을 추며 '무사비'를 연호했다.

#2.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 현 대통령이 63% 득표율로 압승을 거뒀다는 이란 당국의 발표가 나온 뒤 불붙은 반정부 항의 시위가 엿새째 이어진 지난 18일 오후.테헤란의 이맘 호메이니 광장에서 열린 추모 집회엔 당국의 무력 진압에 희생된 7명의 사망자를 애도하는 수만명의 시민들이 몰려들어 '우리의 형제는 어디에''아흐마디네자드는 물러나라'는 구호가 씌어진 피켓을 들고 침묵시위를 벌였다. 이들 가운데는 발끝까지 내려오는 검정색 차도르 대신 블랙 반소매 원피스를 입고 검정색 선글라스를 쓴 여대생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무사비 뒤엔 자흐라 라흐나바르드 있다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의 부정선거 의혹으로 당선 무효화와 재선거를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이란에서 여성들이 변화의 물결을 주도하고 있다. CNN은 '이란 전체 유권자 4600만명 가운데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이 이슬람 근본주의를 내세워 여성을 억압해온 아흐마디네자드의 독재 정권에 반기를 들며 대규모 시위를 촉발시켰다'고 보도했다. 이란 사태를 이끈 개혁파 무사비 지지자의 대부분은 바로 여성이다. 이들은 무사비가 상징색으로 삼은 녹색(green) 혁명에 합세,자유와 평등을 외치고 있다.

무사비 지지 여성의 상당수는 '이란의 미셸 오바마'란 별명의 그의 아내 자흐라 라흐나바르드를 더 신망하고 있다. 총리직을 끝으로 1989년 정계를 떠난 무사비는 개혁파 정치인이기보다는 '자흐라 라흐나바르드의 남편'으로 유명했다. 이란 혁명 후 여성 최초로 명문 테헤란대 학장을 지낸 그녀는 이란 여성의 억압을 줄기차게 비판해온 페미니스트 중 한 사람이다. 그녀는 선거 유세 기간 내내 퍼스트 레이디의 정치 참여를 금기시한 이란 율법을 깨고 무사비의 손을 꼭 붙잡고 거리 캠페인에 나섰다. 라흐나바르드는 "3400만명의 이란 여성들은 여성을 억압하는 시민법과 가족법이 개정되길 바란다. 여성은 이란의 2류 시민에 불과했다"며 여성 유권자들의 표심을 자극했다.

◆'차도르'에 억압됐던 이란 여성의 자유

검은 차도르에 갇힌 이란 여성들의 인권 억압 역사는 1979년 이란 혁명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친서방 산업화 정책을 편 팔레비 왕조를 몰아내고 이란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른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이란의 서구화,세속화를 비판하며 여성들에게 코란(이슬람 율법)을 강요했다. 이때부터 이란 여성들은 온몸을 뒤덮는 검은 차도르를 두르고 검정색 히잡을 써야 했고 화장이 진하거나 복장이 자유로운 여성들은 길거리에서 소위 '도덕경찰'로부터 채찍질과 매질을 당하기도 했다. 정치는 물론 경제 교육 문화 등 사회 전반에서 여성의 자취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서구식 개혁에 따라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대거 관직에 진출했던 팔레비 왕조 시절과 확연히 대비된다.

◆"30년 억압된 민주주의 실험"

이란계 미국인 여기자인 로야 하카키안은 최근 포브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번 사태는 이란 페미니즘 운동의 확장"이라며 "이슬람 혁명 이후 마초적으로 변한 이란 정권에 대한 도전이자 억압 속에서 민주주의를 연습해온 이란 민주주의의 실험"이라고 해석했다. 전문가들은 혁명 이후 누적된 여성 억압과 지배층의 극우주의,경제난과 양극화 등 총체적인 문제가 200만명이 참여한 30년래 최대 규모의 시위로 표현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란 여성들은 30여년간의 억압 속에서 조용히 힘을 키워왔다. 이란 혁명 뒤에도 이란 여성들의 투표와 경제활동 교육이 인정됐던 게 주효했다. 투표권은커녕 외출과 운전조차 금지시킨 사우디아라비아 등 보단 억압의 수위가 낮았다.

현재 이란 대학생의 65% 이상은 여성이고 이란 국민의 70% 이상이 30세 이하 젊은 층이다. 여성 해방을 통해 이란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젊은 층의 움직임이 활발해진 이유다. 1989년 호메이니가 사망한 뒤 이란 여성들은 보수주의자들의 견제 속에서도 정치적 발언을 꾸준히 늘렸다. 1997년 정부가 여성들의 축구 경기 관람을 금지하자 5000명의 여성들이 국가대표팀 월드컵 예선전이 열리는 경기장에 쳐들어가 '풋볼 레볼루션'을 일으켰다. 1997년과 2001년엔 여성 유권자의 힘으로 개혁파 모하마드 하타미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가 얻은 표의 60%는 여성에게서 나왔다. 이란의 첫 여성 판사이자 인권변호사인 시린 에바디는 200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며,차별에 맞서 싸운 이란 여성들의 투쟁기를 세계에 알렸다.

세계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이란 여성들이 촉발시킨 '하이힐 혁명'이 이란 사회 전반을 바꾸는 '제2의 이란혁명'을 이끌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김미희 기자 iciic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