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톈만먼 학생시위, 리펑의 음모로 격화"
"리펑 톈안먼 광장서 벌벌 떨어" "장쩌민도 상하이서 시위대에 압도돼"

"18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당시 리펑(李鵬) 중국 총리는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인민일보에 학생시위를 `반(反) 공산당, 반 사회주의'로 규정하는 사설을 게재토록 했다.이 같은 리펑의 음모가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를 격화시켰다."

1989년 톈안먼 학생민주화 시위 당시 온건노선을 펼치다 실각한 자오쯔양(趙紫陽)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의 사후 회고록 `국가의 죄수'(The Prisoner of the State)가 14일 미국의 시몬 앤드 숴스터 출판사에 의해 출간됐다.

이 책은 홍콩을 비롯한 각국 서점에서 이날부터 발매되기 시작했다.

자오쯔양은 1989년 톈안먼민주화운동 무력진압을 결정한 덩샤오핑에 반기를 들었다가 권좌에서 쫓겨나 가택연금 생활을 하다 2005년 1월 사망한 비운의 정치가다.

자오쯔양의 회고록은 30시간 분량의 그의 육성 녹음 테이프를 토대로 하고 있다.

자오쯔양의 절친한 친구 3명이 그가 살아있을 때 녹음한 테이프를 몰래 중국 밖으로 반출해 출판이 이뤄질 수 있었다.

자오쯔양의 회고록은 `개혁역정(改革歷程)'이라는 제목의 중국어판으로도 곧 출간될 예정이다.

자오쯔양은 실각 20년만에, 사후 4년만에 빛을 보게 된 이 책에서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톈안먼 사태의 진실을 격정적인 어조로 설명하고 있다.

◇ "텐안먼 민주화 시위는 리펑의 음모로 격화됐다"

자오쯔양은 회고록에서 톈안먼 사태 당시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에 대한 무력진압 결정은 리펑 총리와 같은 골수 보수파들의 음모와 권력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덩샤오핑의 조바심이 없었다면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자오쯔양은 당시 베이징 시장이던 천시퉁(陳希同), 야오이린(姚依林) 등을 강경 보수파의 핵심인물로 지목했다.

특히 회고록에서 자오쯔양은 1989년 4월 26일 중국 공산당의 대변지 역할을 하고 있는 인민일보가 사설을 통해 평화적으로 진행되던 학생들의 시위를 `반 공산당, 반 사회주의적'이라고 매도함으로써 학생들의 시위가 격화되고 규모가 커졌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그는 "덩샤오핑은 4월 25일 리펑 총리를 비롯한 당 지도부들과 내부 모임을 가졌다.

덩샤오핑은 학생시위에 대한 자신의 발언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덩샤오핑의 발언은 다음날 인민일보에 각색돼 실렸다"면서 인민일보 사설의 배후에는 리펑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자오쯔양은 덩샤오핑은 자신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자신의 발언을 공개한 리펑에 대해 불쾌해했으며, 다시는 그와 같은 행동을 하지 말도록 리펑에게 경고를 했다고 소개했다.

이 같은 덩샤오핑의 진노에 대해 리펑은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거듭 다짐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자오쯔양은 학생시위의 무력진압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은 최고 권력자였던 덩샤오핑이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오쯔양은 "문제의 핵심은 덩샤오핑 자신에게 있었다"면서 "덩샤오핑이 자신의 입장을 바꾸지 않는 한 리펑과 야오이린이라는 두 강경보수파의 태도를 변하게 만들 방법은 없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덩샤오핑은 민주주의가 안정을 저해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학생들의 시위에 대처하는 데 있어서 항상 강경책을 선호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덩 샤오핑은 항상 안정에 대해 언급했으며 독재를 강조했다"고 말했다.

◇"리펑은 겁쟁이...톈안먼광장서 벌벌 떨어"

자오쯔양은 톈안먼 학생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는데 관여한 리펑 총리를 `겁쟁이'라고 묘사했다.

리펑은 1989년 5월 19일 자신과 함께 학생들이 단식농성을 벌이던 톈안먼 광장에 갔으나 도착 즉시 현장에서 빠져 나왔다고 자오쯔양은 전했다.

그는 "리펑은 광장에 도착하자마자 겁에 질려 도망을 갔다"면서 "리펑의 태도에 분노를 느꼈다"고 썼다.

자오쯔양은 또 자신이 톈안먼광장에서 홍콩을 비롯한 외국의 텔레비전방송사들이 생중계를 하는 가운데 학생대표들을 면담하는 사이 리펑은 이미 `지도부 교체' 문제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자오쯔양은 "5월17일 덩샤오핑의 자택에서 모임을 가진 뒤 리펑과 그의 동료들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비이성적인 행동을 했다"면서 "내가 학생들을 만나기 위해 병원이나 톈안먼 광장을 방문하려 할 때 그는 여러 번 나의 행동을 제지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또 리펑이 경제를 다룬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덩샤오핑이 그를 총리로 기용하기까지 여러 번 망설였다고 전했다.

이밖에 자오쯔양은 리펑은 유럽 방문 도중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소련에 들르는 등 제멋대로 행동을 해 평판이 좋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등 리펑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 "상하이 당서기였던 장쩌민도 시위대에 압도돼"

자오쯔양은 당시 상하이(上海) 당서기였던 장쩌민(江澤民) 전 중국 국가주석이 상하이의 학생시위에 적극 대처하다가 덩샤오핑의 눈에 들어 총서기직을 맡게 됐다는 기존의 통설을 뒤엎는 증언을 했다.

자오쯔양은 장쩌민이 상하이에서 시위대에 압도돼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5월10일 장쩌민이 베이징으로 와서 소요를 진정시킬 방안을 무엇인지 물었다. 나는 그에게 `중앙정부의 개입없이 상하이시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해줬다. 그러자 장쩌민은 불만이 있었던 것 같았다"고 소개했다.

그는 자신의 전임자인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에 대해 개혁적인 마인드가 있고 관대한 반면 사려깊지 못한 인물로 평가했다.

◇ 실각.가택연금의 고통 토로

자오쯔양은 1989년 실각후 가택연금 생활을 하면서 느낀 고독감과 고통을 솔직하게 토로했다.

그는 장쩌민 전 주석을 비롯한 당 지도부에게 수차례 편지를 보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연금에서 풀어줄 것을 요청했다는 사실도 털어놓았다.

그는 "나는 여생을 고독하고 낙담스러운 환경에서 여생을 마치기를 원하지 않는다. 가택연금이 해제되고 개인적인 자유가 회복되기를 원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장쩌민 당시 주석에게 보냈으나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홍콩연합뉴스) 정재용 특파원 jj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