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표지 모델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 일본의 아소 다로 총리는 지난 9일 도쿄에서 일본기자클럽 회견 도중 불쑥 중국 패션잡지 하나를 들어 보였다. '에비짱'이란 애칭의 유명 탤런트 에비하라 유리가 표지 모델인 잡지였다. 그는 일본 연예인들이 표지 모델로 나온 대만 여성 잡지 등도 소개하며 기자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아소 총리가 이날 설명하려 했던 건 일본의 '소프트 파워'다. 일본의 여성 모델이 아시아 패션계를 주름잡듯이 콘텐츠 산업을 핵심으로 한 소프트 파워를 신성장 동력으로 삼겠다는 전략을 밝힌 것이다. 아소 총리는 현재 2500억엔(약 3조4000억원)인 일본의 연간 콘텐츠 수출을 2020년엔 10배인 2조5000억엔으로 키우겠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아소 총리가 자신감을 보일 수 있었던 건 일본의 콘텐츠 경쟁력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이미 보통 명사로 자리 잡은 '망가(만화)'가 대표적이다. 도리야마 아키라의 만화 '드래곤 볼'은 20세기 최고의 문화 상품 중 하나로 꼽힌다. '드래곤 볼'은 일본에서 약 2억부,세계에서 3억부 이상 팔렸다. '드래곤 볼' 애니메이션이 프랑스에서 방영됐을 때 시청률은 무려 67%를 기록했다. 원자바오 중국 총리도 "중국 어린이들이 일본 만화인 '울트라 맨'에 너무 빠져 있다"고 걱정할 정도다.

닌텐도의 게임기 'DS '나 '위(Wii)'도 사실은 콘텐츠 상품이다. 게임기 하드웨어는 단순한 전자 기기에 불과하다. '닌텐도DS'와 '위'의 매력은 할수록 빠져드는 게임 소프트웨어에 있다. 닌텐도의 주 수입원도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다. 작년 말까지 'DS'와 '위'의 하드웨어가 9622만대와 4496만대 팔린 데 비해 게임 소프트웨어는 각각 5억3338만개와 3억1222만개 판매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럼 한국의 콘텐츠 산업 경쟁력은 어떨까. 그리 높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올초 "한국에선 왜 닌텐도 게임기 같은 게 나오지 않나"라는 말로 촉발했던 '명텐도' 논란의 귀결점도 한국 게임 소프트웨어 산업의 취약성이었다. 소프트웨어 불법 복제가 판치는 한국에서 게임 산업이 발전하길 바라는 건 도둑 심보다. 천하의 닌텐도도 게임 불법 복제 때문에 한국에서 고전하는 마당에 닌텐도 같은 회사가 탄생하길 기대할 수는 없다.

문제는 콘텐츠에 제값을 쳐 주지 않는 척박한 풍토다. 정품 3만5000원짜리 '닌텐도DS' 게임 소프트웨어를 한국의 인터넷에선 60원이면 구할 수 있다. 가요 영화 드라마 등 문화 콘텐츠도 인터넷에선 '공짜 천국'이다. 윈도 MS오피스 아래아한글 등 컴퓨터 소프트웨어도 정품을 제값 주고 사면 바보 취급받는 게 한국이다. 신문의 뉴스 콘텐츠를 거의 100% 인터넷 포털에서 무료 서비스하는 나라도 우리나라뿐이다. 세계 100대 소프트웨어 회사 중 한국 기업이 한 곳도 없는 이유다. 제값을 받지 못하는데 누가 공들여 질 좋은 콘텐츠를 만들겠는가.

한국도 콘텐츠 산업의 잠재력은 있다. 일본 중국 등 아시아에서 폭발적 인기를 끄는 한류 드라마만 봐도 알 수 있다. 잠재력의 싹을 키워 열매를 따려면 콘텐츠에 제값을 주는 문화부터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콘텐츠 산업이 꽃 피고 열매를 맺는다. 세계 소프트웨어 시장 규모는 7400억달러로 반도체(2500억달러)보다 훨씬 크다. 일본은 이미 그 시장 공략에 총리부터 팔을 걷어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