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3(한 · 중 · 일) 정상회의' 참석차 태국 파타야를 방문 중이던 이명박 대통령은 11일 오전 10시쯤 숙소인 두싯타니 호텔을 떠나 회의장으로 가려고 했지만 포기해야만 했다. 탁신 친나왓 전 총리를 지지하는 '독재저항 민주주의 연합전선(UDD)'이 이끄는 반정부 시위대 수백명이 택시 100여대를 앞세워 호텔 앞을 봉쇄했기 때문이다. 태국이 다시 극심한 정치적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지난해 11월부터 올초까진 탁신 전 총리 반대파가 나라를 흔들더니 이번엔 탁신 지지파가 연일 정부를 곤경에 빠트리고 있다. 쿠데타설이 난무하고 내전 가능성도 거론된다.

◆반정부 시위로 정상회의 무산

파타야 시내는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다. 이날 열릴 예정이었던 아세안+3 외무장관 회의가 무산된 이후 두싯타니 호텔 봉쇄를 푼 UDD 시위대는 대형 폭죽과 화염병,새총,각목,쇠파이프 등으로 무장한 채 택시와 픽업트럭 등에 나눠 타고 파타야 해변 도로를 따라 정상회의 개최 장소인 로열 클리프 호텔로 이동,회의장을 점거했다.

빨간 옷을 입고 시위를 벌인다고 해서 '레드 셔츠'로 불리는 UDD 시위대는 1000여명으로 불어났고 정상회의장을 지키려던 푸른 옷차림의 현지 주민들과 격렬한 충돌을 벌였다. 이날 방콕에서 파타야로 몰려온 UDD 시위대 규모는 모두 1만명으로 추산된다고 현지 당국은 밝혔다. 탁신 지지파들이 섞여 있는 경찰은 적극적으로 시위대를 막지 않았다.

이날 친탁신단체의 과격 시위로 아세안+3 정상회의와 동아시아정상회의(EAS) 관련 일정뿐 아니라 뒤이은 아세안-유엔 정상회의,국제금융기구 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하는 세계경제정상회의도 모두 무산됐다. 일부 정상들은 헬기와 보트를 이용해 회의장을 빠져나와 본국으로 귀국했다. 다자 정상회의가 개최국 내 시위로 무산돼 각국 정상이 철수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태국 정국이 빨리 정상으로 회복되길 희망한다"고 유감을 표명했다.
[태국 무정부상태] '레드셔츠' 파타야 장악 … 쿠데타설 난무ㆍ내전 우려도
◆'친탁신'이냐 '반탁신'이냐 극한대립

이번 사태는 탁신 전 총리를 둘러싼 찬반 양대 세력의 극한 대립에 원인이 있다. 반탁신 세력은 방콕을 중심으로 중산층과 친민주화 세력 및 왕정주의자 등이며 군부 내에도 다수 세력이 존재한다. 2005년 결성된 국민민주주의연대(PAD)를 중심으로 한 반탁신 세력은 탈세 의혹 등에 휘말린 탁신과 그 추종세력에 강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은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며 지난해 12월 아피시트 웨차치와 정권을 창출해냈으나 아피시트 총리가 정국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면서 정쟁이 더욱 심화되는 양상이다.

친탁신 세력은 탁신이 태국 경제를 살렸다고 평가하는 농민과 도시 빈민층이 주세력이다. 탁신의 고향인 치앙마이를 비롯한 북부와 북동부 지역이 중심이며 UDD가 대표단체다. 이들은 아피시트 총리 퇴진과 조기 총선을 주장하고 있다. 자크라포브 펜카이르 UDD 공동대표는 "정상회의를 무산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아직 목표를 달성한 것이 아니다"며 "방콕에서 아피시트 총리 퇴진을 위한 시위를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방콕의 반정부 시위대는 10만명 이상으로 늘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최악의 경우 양 단체 간 충돌이나 내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수리야사이 카타실리 PAD 대변인은 최근 "PAD 지도부가 현 상황을 면밀히 지켜보고 있다"며 "UDD가 사회 혼란을 초래하도록 좌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찬비트 카세트시리 탐마사트대학 전 총장은 "상황은 막다른 골목으로 향해 가고 있다"며 "군부 개입도 배제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태국은 1930년대 이후 총 18차례의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다.

◆태국 국가신인도 타격

현지 증권사인 아시아플러스시큐리티스의 콩키아트 오파스웡칸 최고경영자(CEO)는 "악화된 태국 경제가 이번 사태로 인해 관광업 등 각 산업에서 큰 손실을 입을 것이 명백하다"고 밝혔다. 콩크리트 히라냐키지 태국관광청장은 "이번 소요로 지난해 방콕 국제공항 폐쇄로 인한 37억달러 손실에 못지않은 피해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로 아세안의 경기 회복 노력에도 차질이 빚어지게 됐다. 중국은 정상회의에서 아세안에 100억달러를 투입하는 인프라투자펀드를 조성하고 아세안 국가들에 150억달러를 저리 대출한다는 내용을 발표할 예정이었지만 무산됐다. 아세안은 또 중국 및 인도와 맺기로 한 자유무역협정(FTA)도 체결하지 못했다.

파타야=홍영식/서기열 기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