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이 중앙은행의 역할 확대를 모색하고 있다. 1929년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기침체를 겪으면서 중앙은행의 임무를 물가안정에서 금융시장 안정 및 경기부양으로 확대하는 추세다.

16일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따르면 미국 영국 유럽 등 선진국은 물론 말레이시아 한국 등 아시아에서도 중앙은행의 역할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잇따르고 있다. WSJ는 세계의 중앙은행들은 위기 때마다 역할 조정이 있어왔다며,중앙은행의 존재 자체가 '위기의 산물(creatures of financial crises)'이라고 지적했다.

세계 각국 중앙은행 '슈퍼캅'으로 변신중
미국이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에 경제 전반의 위험(리스크)을 광범위하고 체계적으로 다루고 모니터링하는 권한을 부여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게 대표적이다. FRB의 새 영역에는 △대형 헤지펀드 감독 △은행 지급 및 결제 시스템 감독 △파생상품 등 금융상품 모니터링 등이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고 월지는 전했다. FRB가 통합적인 감독 권한을 행사하길 원하는 티모시 가이트너 재무장관의 이 같은 구상이 미 의회의 관련법 개정과 함께 실현되면 FRB는 '슈퍼캅(슈퍼경찰)'으로 탄생하게 된다.

바니 프랭크 하원 금융서비스위원장이 최근 발의한 법안도 금융업의 과도한 리스크 부담 관행을 억제하기 위해 은행뿐 아니라 보험 헤지펀드 등에 대한 정보 수집 권한을 FRB에 부여하는 게 골자다. 1913년 금융 패닉을 겪은 후 설립된 FRB는 1929년 대공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으면서 고용과 성장률 제고를 위한 통화정책에도 주력하기 시작했다. 이후 1970년대 두 차례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인플레 억제로 무게중심이 옮겨 갔다가 이번 금융위기로 금융 안정 역할 강화에 대한 주문이 커지고 있다.
세계 각국 중앙은행 '슈퍼캅'으로 변신중
1997년 은행 감독권을 금융감독청(FSA)으로 넘긴 영국중앙은행(BOE)도 이번 금융위기 이후 금융 안정에 필요한 권한을 강화하는 추세다. 지난달 영국은행법을 고쳐 설립 목적에 '금융 안정'을 추가했다. 특히 영국 의회가 BOE에 채권과 CP(기업어음) 매입을 위해 500억파운드(100조9700억원)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기로 한 것은 BOE가 1997년 금리 결정 권한을 재무부로부터 넘겨받은 이후 통화정책 운용 틀의 가장 큰 변화라고 블룸버그통신은 보도했다. BOE가 금리 인하뿐 아니라 발권력을 동원한 '양적완화(채권 매입 등을 통한 직접적인 통화공급)' 정책을 통해서도 경기부양에 나설 수 있도록 수단을 제공한 것이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유로화를 사용하는 16개국에 적용되는 금리 결정권뿐 아니라 유럽 여러 지역에 걸쳐 영업을 하는 은행들에 대한 감독권을 갖기를 원하고 있다고 월지가 최근 전했다. ECB는 현재 FRB와는 달리 대형 은행의 장부를 들여다볼 권한이 없다.

말레이시아 중앙은행인 '뱅크네가라'도 새로운 권한을 추가한 중앙은행법 개정안을 올해 의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제티 아크타르 아지즈 뱅크네가라 총재는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경제와 금융 환경이 50년 전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며 "은행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도 물가안정으로 제한된 한국은행의 설립 목적에 금융시장 안정을 추가하고,금융위기시 은행이나 기업에 출자하거나 직접 대출할 수 있는 요건을 완화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한국은행법 개정안이 논의되고 있다.

오광진 기자/워싱턴=김홍열 특파원 kj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