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가격 하락과 수요 부진으로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는 글로벌 D램 업계가 4개 기업군(群)이 경쟁하는 과점시장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업계 3위인 일본 엘피다와 4위 미국 마이크론이 각각 대만 군소 반도체 업체들과 짝을 지으려는 작업이 초읽기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엘피다가 프로모스 등 대만 3개사와 합칠 경우 합계 생산량이 업계 2위인 하이닉스반도체를 넘어서게 된다. 마이크론도 나머지 대만업체들과의 연합에 속도를 내고 있어 조만간 글로벌 D램업계는 삼성전자가 앞서가는 가운데 엘피다 연합,하이닉스,마이크론 연합이 그 뒤를 쫓는 '1강3중' 구도로 바뀔 것이란 게 업계 전망이다.

◆엘피다 연합군 등장 초읽기

니혼게이자이신문은 11일 엘피다가 대만의 D램 업체인 프로모스,파워칩,렉스칩 등 3개사와 경영을 통합하기로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반도체 업황 악화를 헤쳐나가기 위한 고육책이다. 엘피다의 사카모토 유키오 사장은 최종 통합 교섭 마무리를 위해 현재 대만을 방문 중이며,이달 중 통합을 공식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경영 통합은 올해 중 완료될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통합 형태는 4개사가 공동으로 출자하는 지주회사를 설립,산하에 엘피다와 렉스칩을 두고 렉스칩 밑에 파워칩과 프로모스를 합류시키는 형태가 유력하다. 지난해 엘피다와 파워칩,프로모스의 시장점유율은 각각 15.3%,4.0%,2.7%였다.

업계 관계자는 "엘피다와 대만 정부는 '아직 확정된 것이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통합 작업에 상당한 진전이 이뤄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고 말했다.

◆마이크론도 대만 업체들에 러브콜

11.3%의 점유율로 업계 4위에 오른 마이크론도 덩치를 불리는 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대만 언론들은 이날 마이크론이 대만 반도체 업체인 난야,이노테라,파워칩,윈본드 등과의 통합안을 대만 정부에 제출했다고 보도했다. 눈길을 끄는 건 파워칩이 엘피다와 마이크론이 각각 추진하고 있는 연합군에 모두 포함돼 있다는 점이다. 파워칩이 어느 연합군에 합류할지 막판 저울질에 한창이라는 얘기다.

최근 파산한 업계 5위 독일 키몬다도 새 주인을 찾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키몬다 관계자가 지난 10일 마이크론 연합군에 포함된 난야의 모기업 포모사그룹을 방문,인수 의사를 타진한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 · 하이닉스,"기술력으로 승부"

엘피다와 마이크론 연합이 형성된다 해도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타격을 입을 가능성은 적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두 회사가 가격 경쟁력을 좌우하는 미세공정 기술에서 우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과 하이닉스는 최근 40나노급(㎚ · 1㎚는 10억분의 1m) 기술 개발에 성공,올해 3분기부터 제품 생산에 적용할 예정이다.

반면 엘피다는 올 2분기 이후 50나노 공정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벌일 것으로 전해졌다. 마이크론 연합 역시 아직 60나노대에 머물러 있다. 마이크론은 연말 무렵 58나노 공정을 도입할 예정이다. D램은 나노수가 낮을수록 생산 효율이 높다.

업계 관계자는 "연합군 멤버 중 가장 기술력이 뛰어난 엘피다도 국내 업체들에 비해 기술력에서 6개월 이상 뒤처져 있다"며 "한국 업체들이 엘피다보다 20~30%가량 저렴한 가격에 제품을 내놓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 · 대만 정부 지원이 변수

문제는 각국 정부가 새로 형성될 반도체 연합에 보조금 지급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엘피다는 대만 정부로부터 금융지원을 받아 투자를 위한 '실탄'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대만 정부는 지난해 말부터 일본 업체와의 통합을 전제로 반도체 회사들에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방안을 검토해왔다.

엘피다는 이와 별도로 일본 정부에 공적자금을 신청,수백억엔의 증자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일본과 대만의 통합 반도체회사에 두 나라 정부가 각각 공적자금으로 뒷받침하는 모양이 갖춰진다. 정부 도움 없이 사업을 진행하는 국내 업체들로서는 부담스러운 대목이다.

삼성과 하이닉스는 일본과 대만 정부의 지원이 노골화될 경우 세계무역기구(WTO)에 보조금 금지 규정 위반 혐의로 제소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송형석 기자/도쿄=차병석 특파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