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신저,이메일,휴대폰 등 통신 도구의 혁명적 발전이 전 지구화를 이끌었지만 불과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가장 확실하고 대중적인 소통 수단은 인편으로 보내는 편지였다. 한지에 붓으로 쓴 편지를 인편으로 보내고 그 편에 답장을 받아 오는 식이었다. 품도 시간도 많이 드는 그 번거로움을 이메일이나 메신저에 비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편지를 통해 안부를 묻고 학문과 사상,생각을 나눴던 옛사람들의 소통 의지와 노력은 첨단 정보통신(IT) 기술을 자랑하는 이 시대 못지않았던 것 같다. 지난 9일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과 한국고전번역원이 공개한 조선 후기 정조의 비밀 편지 299통은 선인들의 소통 의지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정조는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1730~1802)와 무려 4년에 걸쳐 편지를 주고받았다. 많을 때는 하루에도 네 통,어떤 날은 아침에만 세 번이나 편지를 보내 의견을 조율했다.

1797년 6월27일자 편지에서 정조는 천주교 신자라는 비방 때문에 동부승지를 사양했던 정약용을 서반(西班 · 무반)으로 보내지 않은 것을 들어 "한두 가지 일 때문에 반세(半世)의 원한과 유감이 날로 심해지니 이러한 것들을 어찌 유념하지 않는가"라고 질책했다. 이조참의 김조순이 인사 안을 만들면서 남인과 소론의 인물들은 후보자 명단에도 올리지 않은 것을 꼬집은 것이다.

또 "남의 옳지 않은 점을 보면 힘껏 말하고 통렬히 배척하는 것이 벽파의 장점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며 벽파계 인물들에게 강력한 의리론을 펴도록 주문하기도 했다.

정조가 비밀 편지를 주고받은 이는 심환지뿐만이 아니었다. 현재 남아 있는 정조 어찰은 이번에 공개된 것을 빼고도 200통 안팎이다. 편지의 수취인은 시파의 채제공,조심태,외사촌 동생 홍취영 등 다양하다. 정조의 편지는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이번 어찰첩에서도 드러났듯이 정조는 자신을 지지했던 시파는 물론 비판 세력인 벽파를 비롯해 다양한 정파의 인물들과 편지를 통해 소통하고 의견을 조율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정조의 비밀 편지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리더십을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일일까. 정조는 당파적 차원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인물들과 다양하게 소통하며 개혁을 추진했다. 오바마 대통령 또한 소속 정당(민주당)이나 반대당(공화당)의 이해에 관계 없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장하고 관철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자신이 발의한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공화당 의원들을 일일이 찾아가 설득하는 노력도 마다하지 않았다.

반면 어느 때보다 소통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소통'이 아니라 '먹통'인 게 우리 현실이다. 여당과 야당은 자신의 주장에만 소리를 높일 뿐 상대방의 의견에 귀기울이지 않으며,남과 북의 소통도 막혀 있다. 용산 참사를 둘러싼 공방도 경찰 탓이냐 점거 농성자 탓이냐로 갈려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은 뒷전이다.

다양한 의견에 귀기울이지 않는 한,또 서로를 인정하고 포용하지 않는 한 사회 통합은 요원하다. 기업도 정치도 마찬가지다. 지금 당장 내 주변을 둘러보자.그리고 전화든 이메일이든 편지든 직접 대화든 소통에 나서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