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바오 중국 총리가 2일 6박7일간의 유럽연합(EU) 5개국 순방을 마쳤다. '자원 외교'라는 신조어를 만들며 조용히 실리를 추구하던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거침없이 '중국의 말'을 쏟아냈다. 미국을 '저소득 고소비의 기형적 경제구조 국가'로 몰아붙이고,불편한 관계인 프랑스를 '왕따'시켰다. "중국의 환율이 급변하면 세계경제가 재난에 빠진다"고 위협성 경고를 하기도 했다. 고개를 쳐든 굴기(山屈起 · 우뚝서다) 외교'를 확인한 게 이번 원 총리의 EU 순방 관전 포인트다.

원 총리는 2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 회견에서 "위안화 환율변동이 극심해지면 세계경제에 재앙이 닥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며 '위안화 환율은 중국이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균형 있고 합리적인 수준으로 환율을 안정시키는 게 중국뿐 아니라 세계에도 이롭다는 종전 입장을 거듭 확인한 것이다. 그는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에 중국이 자금을 출연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이들 기관이 먼저 개혁돼야 한다"고도 했다. 미국과 EU가 주도하는 세계 금융질서의 재편을 요구한 셈이다.

특히 이번 출장길에는 미국을 겨냥한 날 선 발언이 많았다. 금융위기의 중국 책임론을 미국 측에서 제기한 것에 대해 작심한 듯 "일부 국가(미국)의 부적절한 거시경제 정책과 낮은 저축률,지나친 소비가 위기를 불러왔다"고 비판했다. 또 미국 국채를 지속적으로 살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라고 꼬집고 "중국의 자산을 보호할 수 있고 투자할 가치가 있으면 살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이 하기에 따라 미 국채를 살 수도 있고 안 살 수도 있다며 압박을 가한 것이다.

가는 곳마다 보호무역주의의 타파도 강조했다. 중국과 무역분쟁이 많은 미국이나 EU에 대한 일종의 경고다. 미국에서 경기부양시 미국산 철강제품의 사용을 의무화한 '바이 아메리칸' 조항을 시행하려고 하는 시점에서 나온 원 총리의 발언은 다분히 계산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와 함께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 문제로 불편한 관계인 프랑스에는 철저한 보복을 가했다. 프랑스와 경쟁국인 독일에 대해선 대규모 구매사절단을 보내고,합작 및 투자 계약을 잇따라 체결했지만 프랑스는 방문국에서 아예 제외해버렸다. 프랑스는 엘리제궁에서 열려던 중국 · 프랑스 수교 45주년 기념식을 취소해야 했고,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중국과 프랑스 우정만세'라는 기고문을 화교 신문에 게재하며 구애의 메시지를 보내는 처지로 몰렸다.

베이징의 한 외교전문가는 "원 총리의 이번 EU 순방은 앞으로 중국의 목소리를 내겠다는 것을 보여줬다"며 "그동안 무역 환율 인권 등 각 방면에서 수세에 몰리던 중국이 이제는 공세적 자세로 전환해 중국의 힘을 과시하며 능동적으로 대응해나갈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원 총리는 또 이번 유럽 순방을 통해 대외에 중국의 영향력을 과시하는 동시에 중국발 경착륙 우려를 씻어내는 데도 주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FT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은 경기를 자극하고 소비를 부추기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할 것"이라며 "추가 경기부양책을 검토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중국은 지난해 11월 4조위안(약 800조원) 규모의 경기부양책을 발표한 바 있다. 그는 "시의적절하며 단호한 새로운 (경기부양) 대책을 취할 것"이라며 "모든 조치는 경기 후퇴를 막기 위한 선제적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원 총리는 1일 런던에서 가진 기업인들과의 회동에서 "중국 경제가 지난해 12월 마지막 열흘간 개선 조짐을 보였다"면서 "재고가 줄어들고 산업 생산도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베이징=조주현 특파원 forest@hankyung.com